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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의 인물

성현의 어머니, 춘천 박씨 부인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은 고난의 일생을 사셨지만 또한 영광의 일생을 사셨다.
고난의 일생을 사셨다고 하는 것은 6남1녀를 편모 혼자 힘으로 장성시켜 성혼에 이르게 하기까지 고생이 막심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며, 영광의 일생을 사셨다고 하는 것은 퇴계와 같은 대현을 길러 내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퇴계 연보(年譜)에는 그가 지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묘갈(朴氏墓碣)을 인용해서 고생스러웠으나 영광스러웠던 생애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선군(先君)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에 큰형이 겨우 장가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 것들이 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부인은 자식은 많고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뼈아프게 염려해서 더욱 더 농사짓기와 양잠일에 힘을 써서 옛 살림을 잃지 아니하였고,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게 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켜서 매양 훈계하였으니, 무릇 문장에만 힘쓸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항상 재삼 간절히 타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보통 과부의 자식을 옳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욕을 할 것이니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비평을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어머니에게 얻은 바가 많았다』
퇴계연보는 모부인 박씨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퇴계가 8세였을 때 퇴계의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쳤다. 퇴계가 형을 붙들고 우는 것을 보고 어떤 부인이 말했다. 『너희 형은 손을 다쳤는데도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퇴계가 대답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 아니하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퇴계는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여 어른에게 태만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밤중에 깊이 잠이 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서 대답하기를 매양 겸손하게 하였다. 6,7세 때부터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그 품성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물론 어머니의 훈도가 퇴계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퇴계는 어머니 춘천박씨의 내력을 묘갈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머니 박씨의 선대는 춘천을 고향으로 살고 있다. 고려말에 원비(元庇)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판사(判事)였다. 이 분이 광정(光廷)을 낳았고,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大竹里)로 이사하였으니 곧 어머니의 고조부 이다. 증조의 이름은 농칠(農漆)인데 현감을 지냈다. 조부는 효전(孝佃)이고 아버지는 치(緇) 인데, 숨은 덕이 있었으나 벼슬은 하지 아니하였다.
박씨 부인의 어머니는 월성 이씨로 생원 시민(時敏)의 딸이다. 대사헌을 지낸 승직(繩直)의 후손이다. 경인년 서기 1470년 3월 18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단아하였으며 자라서 우리 아버지의 계실(繼室)로 들어왔다.

돌아가신 어버지는 뜻이 돈독하고 옛 것을 좋아하였으며 경사(經史)에 탐닉하였다.
또 과거공부는 곁일로 여겼으며 가사에 등한 하였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성심껏 섬기면서 조상을 받들었고 안살림을 근검으로 다스렸다.』라 하였으니, 어머니로서의 직분과 며느리로서의 직분을 이 이상 더 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하는데 부지런함이나 아랫사람을 대하는데 인자함이나 조선시대 여성의 그 표준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

32세에 홀로된 퇴계의 어머니는 남편의 3년상을 마치자 제사일은 맏아들에게 맡기고
그 옆에 방을 지어 거처하면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다.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과 을축년(연산 11년)에는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많은 사람들은 살림이 결단났는데도 박씨 부인은 능히 먼 앞날을 내다보고 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옛 가업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박씨 부인은 손발을 걷어 붙이고 집안 일을 경영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으나, 한편으론 자식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독려하고, 또 공부하도록 글방에 보냈다.

여러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스승을 쫓아 공부하도록 학자금을 마련하였다. 언제나 훈계하시기를 다만 문예만 할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 귀하다 하였고 사물에 알맞은 비유로써 가르침을 하였다.
언제나 간절히 경계하시기를 세상에서는 과부의 아들은 배움이 없다고 말하니 너희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니, 어머니께서 영진(榮進)이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늘상 세상의 환란을 근심하였다.』고 퇴계는 기록하고 있다.
퇴계의 어머니는 글 공부나 과거급제를 단순히 출세로 보지 않고 인간됨의 길로 보았다.

실제로 퇴계는 사마시(진사시험)에 합격한 뒤에 과거 보는 데 뜻이 없었다. 형 대헌공(大憲公)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허락을 받고 퇴계가 과거에 나간 것은 32세 때였다.
이 해에 문과 별시의 초시에 2위로 퇴계는 합격했다. 퇴계 형제의 학문은 어머니의 독려와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34세 되던 3월,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휴가를 얻어서 시골집으로 내려와 근친한다.
퇴계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다.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에 늘 들은 아버님의 정훈(庭訓)과 여러 아들이 서로 강습하는 것을 들어서 가끔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의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게 하는 지식과 생각은 마치 사군자(士君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
정유년(서기 1537년) 10월1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퇴계의 어머니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고 있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실천궁행케 했던데 있었다.
퇴계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형제들을 교육한 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을 닦게 했고, 또 그것을 보통의 어머니로서 실천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여성 교육의 표상이었다.

<한국의 명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