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형님 온계 이해 (溫溪 李瀣)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온계는 진사 이식의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숙부인 송재 이우의 훈도 아래 성장했다.
22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하는 당대의 대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안동부사인 송재의 집을 방문해 두 형제를 보고는, “고인인 이식(온계 형제의 부친)은 이런 형제를 두었으니 헛되게 죽지 않았다”고 칭찬한 뒤 책과 양식을 내려주었을 정도였다.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은 관직에서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 권신들과 타협하지 않은 곧은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처가 쪽으로 당시의 권력 실세였던 김안로(金安老, 연안김씨)의 손짓이나, 척신 윤원형의 제의도 있었지만 모두 물리치고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인종1년(50세) 대사헌 신분으로 전횡을 일삼던 우의정 이기를 논박하여 체직시킨 사건으로 이기의 최대 정적이 되고 말았다. 온계는 이후 그들의 집요한 견제와 회유 협박을 당하며 황해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끝내 충청도 관찰사 재임 중 처리한 일이 빌미가 되어 무고를 당했고 혹독한 형을 받은 뒤 갑산으로 유배 도중에 찌는 더위 속에서 장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장소는 양주의 객점. 향년 55세였다.
후일 대산 이상정은 그를 ‘剛大俊偉非常之人(강대하고 우뚝하며 남들은 쉽사리 하기 어려운 절조를 지켰던 분)’이라고 평하였다. 이에 대산은 ‘통탄하며 눈물을 흘린다(爲之痛傷流涕也)’며 가슴 아픔을 적었다. 온계는 사후 효종 때 유림들의 발의로 고향 안동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1667)에 아버지 이식, 숙부 이우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