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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의 인물

1500년~

1501년
11월 26일
己亥 辰時(79)에 선생께서 禮安縣 溫溪 마을 집에서 나셨다. 선생의 先世께서는 眞寶縣에서 사셨는데 5대조 松安君께서 왜적을 피하여 安東府豊山縣 남쪽 磨崖촌에 옮겨 계시다가 조부 判書公 때에 이르러 예안현 북쪽 온계 마을의 泉石이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비로소 卜居하셨다.
1502년 6월선생 2세
贊成公께서 돌아가셨다. 선생께서 지으신 先貞敬夫人朴氏墓碣에 이르시기를 "선군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에 맏형이 娶妻를 하시고 그 남은 이는 다 어려 眼前에 가득하였으니 모친께서 자식이 많고 일찍이 과부가 되심에 장차 가업을 유지하지 못할까 매우 염려하셔서 농사짓기와 누에치기에 더욱 힘을 써서 옛 가업을 잃지 않으셨다. 모든 자녀들이 점점 자람에 미쳐서는 가난한 가운데도 뒷바라지 하시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보내어 배우게 하시고 늘 가르쳐 경계함을 더하시니 한갖 글재주만 일삼을 뿐 아니라 모가짐과 행실을 삼가기를 더욱 중하게 여겨서 늘 丁寧히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이 늘 과부의 자식은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말하며 허물하니 너희들이 그 공을 백 배나 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비난을 면하겠는가?'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선생께서 비록 일찍 찬성공을 여의셨으나 학문을 성취함에 대부인께 얻으신 것이 많으셨다.
1505년선생 5세
武宗, 正德 원년 (중종 대왕 원년) 丙寅(1506)년 <선생 6세>에 선생께서는 처음으로 글을 읽을 줄 아셨다. 이웃에 어떤 늙은이가 있어 天字文을 조금 알거늘 선생께서 가 배우셨는데 아침마다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그 사람의 울타리 밖에 가서 배운 글을 두어 번씩 가만히 외우신 후에 들어가서 엎드려 배우기를 엄한 스승같이 하셨다.
1508년선생 8세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치니 선생께서 붙들고 우시거늘 모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형은 손을 다쳤으나 울지 않는데 네가 어찌 우느냐?" 하시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 않으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하셨다. 선생께서는 溫恭하시고 遜順하여 어른을 잘 섬기셨는데 尊丈을 대할 때에는 감히 거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고 비록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시면 즉시 깨어나 대답하심을 매우 삼가시니 6, 7세 때부터 그러하셨다.

1510년~

1512년선생 12세
論語를 숙부 松齋公 <송재공의 휘는 이다>에게서 배우셨다. '제자는 들어오면 어버이께 호도하고 나서면 어른께 공순하여야 한다.' 하는 말에 이르러서 근심하여 스스로 깨우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하셨다. 하루는 '理'자의 뜻을 송재공께 물어 말씀하시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理입니까?" 송재공께서 기뻐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벌써 文義를 아는구나."하셨다. 송재공께서는 성품이 간략하고 엄하여 제자에게 許하여 옳다고 하시는 것이 적었는데 선생께서 형 大憲公 瀣와 같이 글을 배울 때에는 송재공께서 늘 칭찬하시기를 "죽은 형이 이 두 아이를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하시고 또 선생을 가리켜 말하기를 "가문을 부지하는 것은 이 아이가 할 것이다."하셨다.
1514년선생 14세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비록 사람이 많이 앉은 곳이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잠심하고 완미하셨다. 陶淵明이 지은 시를 사랑하여 그 사람됨을 사모하셨다.
1518년선생 18세
봄에 놀아 들못을 읊으신 한 절귀가 있으니 가로되
이슬 머금은 가녀린 풀이 물가를 둘러 있으니
적은 못이 淸活하고 좋아 모래도 없다.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원래 서로 어울리지만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결을 차는 것이 두려울 뿐이로다.

이는 理를 형용하여 지으신 글이다.

1519년선생 19세
회포를 읊으신 글이 있는데 이르시기를
홀로 여막 얽어 일만 권 책을 사랑하니
한 가지 심사가 십 년이 넘었도다.
요사이 源頭로 깨달은 듯 하니
모두 내 마음으로 太虛를 보았노라.

원두는 理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요 태허는 하늘의 理를 말하는 것이다.

1520년~

1520년선생 20세
주역을 읽고 그 뜻을 밝혀 궁구하여 자고 먹는 것을 잊으셨다. 이로부터 항상 파리하고 곤한 병환이 계셨다. 뒤에 선생께서 趙士敬에게 주신 편지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릴 적에 일찍이 글에 뜻을 두었으나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한갖 刻苦하기만을 너무 심하게 해서 파리해지는 병을 얻었다." 하셨다. <뜻을 두었다 하신 것은 학문에 뜻을 두심이요 각고는 힘을 매우 괴롭도록 쓰는 것이다.>
1521년선생 21세
부인 許氏를 맞아들이셨는데 진사 瓚의 따님이셨다.
1523년선생 23세
10월에 자제 僉正公을 낳으셨다. 이 해에 선생께서는 처음으로 太學館에 들어가셨다. 이 때는 己卯의 화를 지낸 뒤여서 <靜菴 趙光祖와 모든 현사가 소인에게 잡혀 돌아가신 화이다> 선비들의 풍습이 浮薄하여 선생의 법도 있는 행동을 많이 비웃더라. 더불어 상종하는 이는 河西 金麟厚 한 사람 뿐이었다. 얼마 안되어 선생께서 시골로 내려가시니 河西가 글을 지어 이별하였는데 "夫子는 영남의 빼어난 사람이다. 李杜의 문장이요 王趙의 글씨이다."하는 글귀가 있었다.
1527년선생 27세
가을에 경상도에서 과거를 보시어 進士初試에서는 장원하시고 生員初試에서는 2등하셨다. 10월에 둘째 아드님 寀가 나셨다.
11월 초 7일에 부인 許氏께서 돌아가셨다.
1528년선생 28세
봄에 진사 會試에서 일등하셨다.

1530년~

1530년선생 30세
부인 權氏를 맞으셨다. <奉事 權의 따님이셨다>
1531년선생 31세
6월에 側室에게서 아들 寂이 태어났다.
1532년선생 32세
진사시에 합격하신 이후로는 선생께서 擧業하실 뜻이 없으셨으나<거업은 과거 공부이다> 형 大憲公이 모친께 권하여 과거를 보라고 하시니 이 해에 문과 初試에서 이등하셨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오실 때 길 가 마을에서 주무셨는데 밤중에 도적을 만나 동행은 당황하여 失措하였으나 선생께서는 凝然히 동요하지 않으셨다.
1533년선생 33세
부인 許氏를 맞아들이셨는데 진사 성균관에 가시니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공경하여 감복하는 이가 많았다. 가을에 시골로 내려 오시는 길에 驪州를 지나실 때 慕齋 金安國선생을 뵈었다. 慕齋의 이름은 安國이다. 그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여주 梨湖村에 계셨다. 선생께서 만년에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모재를 뵙고 비로소 正人君子의 의견을 들었다."하셨다. 이 행차에서 忠定公 權撥을 좇아 동행하셨다. 경상도 향시에 장원하셨다. 따님이셨다.
1534년선생 34세
3월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셨다. 4월에 承文院 權知 副正子에 계셨다. 翰林의 천거를 받아 藝文館 檢閱에 春秋館 記事館을 겸직하시다가 즉시 체직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셨다. 이전의 선생 장인 權은 正言 權의 형이셨다. 권진께서 기묘사화 때 사류로서 安處謙의 옥사에 참여함에 권질께서도 또한 座罪하여 廢하게 되셨다. 이에 이르러 대간이 權臣의 뜻을 받아 선생은 권질의 사위이니 史官이 될 수 없고 그를 천거한 사람도 또한 옳지 못하다고 하여 藝文館 官員을 推考하고 선생의 사관 벼슬을 바꿀 것을 啓請하였다. 이에 의견이 분분하여 춘추관 관원이 다 파직되고 선생도 체직되셨다. 金安老의 田庄이 榮川 땅에 있었는데 이 곳은 부인 허씨가 살던 땅이므로 김안로가 동향 연고로서 선생을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선생께서 가 보시지 않으시니 김안로가 노하여 대간을 부추켜 논박한 것이었다. 6월에 正字에 오르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근친하셨다. 10월에 著作에 오르셔서 서울로 가셨다. 문과 廷試의 耆英會圖라 하는 글제에 선생께서 排律 10韻으로 장원하셨다. 11월에 務功郞 博士에 오르셨다.
1535년선생 35세
6월에 護送官이 되어 倭奴를 동래로 데리고 가실 때에 驪州를 지나다가 牧使 李純과 더불어 神勒寺에 오르셨다. <신륵사는 절이름이다.>
지으신 글에
수를 물음에 능히 이치의 속을 더듬을 수 있고
신선을 말할 때에는 바로 時流를 謝絶코자 하네.
하신 절구가 있으니 선생께서 스스로 註를 달아 말씀하시기를 "이순이 皇極經內篇이라 하는 책을 20여 년을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루었더니 이 날 內篇과 參同契의 수련하는 법을 의논하였다."하셨다. <수련은 신선의 참동계 책의 기운을 닦아 오래 사는 법이다.> 이번 길에 예안에 들러 근친하고 가셨다.
1536년선생 36세
3월에 宣務郞이 되셨다. 6월에 成均館 典籍에 오르시고 中學敎授를 겸하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근친하시고 9월에 戶曺佐郞이 되셨다.
1537년선생 37세
4월에 宣敎郞이 되시고 5월에 承訓郞이 되셨다. 9월에 承議郞이 되셨다. 10월에 모친 朴氏의 喪事를 당하셨다. 선생께서 6품이 되시면서부터 外臨을 구하여 養親하고자 하셨으나 當路에 있는 사람이 막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시다가 이에 이르러 서울로부터 奔喪하여 오시니 상중에 柴毁하여 병을 얻으니 거의 구하지 못할 뻔 하셨다. 12월 甲子일에 박부인을 온계 마을 樹谷 언덕에 장사지냈다.
1539년선생 39세
12월에 脫喪하셨다. 弘文館 修撰이 되셨다가 이 날 修撰知製敎에 오르시고 經筵檢討官을 겸하셨다. 그 때에 金安老가 이미 폐하였으므로 선생께서 뽑혀 玉堂에 들어가셨지만 형 大憲公께서 舍人으로 춘추관을 겸하여 계심에 선생께서 相避로 기사관을 겸하지 않으셨다.

1540년~

1540년선생 40세
정월에 司諫院 正言이 되시고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셨다. 2월에 奉訓郞이 되시고 奉直郞에 오르셨다. 3월에 承文院 敎檢을 겸하셨다. 4월에 지제교가 되셨다. 이후로는 당하관 벼슬하실 적마다 예사로 겸하셨다. 司憲府 持平이 되어 經筵에서 아뢰어 말씀하시기를 “요즈음 가뭄이 매우 심하오니 政殿을 피하시고 수라를 감하시고 풍류를 그치시는 일이 비록 文具의 일이오나 행하심을 마땅히 지성으로 하실 것입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자주 赦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아니하오니 옛 사람도 말씀하시기를 ‘赦를 자주 하면 모든 어진 사람이 해를 입고 간사한 사람들이 기뻐한다.’하였으니 요즈음 간사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가뭄이 極하면 반드시 은사를 내릴 것이다’하여 죄를 짓는 자는 희망을 가지므로 죄를 범하는 자는 기탄이 없으니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하시니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들으셨다. 옮겨 刑曹正郞이 되셨다가 얼마 안되어 事情에 의해 벼슬을 그만두셨다. 9월에 敍用되어 다시 형조정랑이 되시고 承文院 敎理를 겸하시다가 弘文館 副敎理에 임명되시고 經筵 侍讀官과 春秋館 記注官을 겸하셨다. 12월에 通善郞을 제수하셨다.
1541년선생 41세
3월에 경연에 들어가셔서 일을 아뢰셨다. 이 때에 牛疫이 심하였기 때문에 선생께서 아뢰어 이르시기를 “五行志에 이르기를 ‘흙이 만물을 생성하는데 흙 기운을 기르지 못하면 곡식이 잘 되지 아니 하니 이에 소의 화가 있다.’ 하였으니 작년 가을에 지진이 일어나는 변이 있었고 지금에는 疫과 牛疫이 일어나니 옛 사람의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닙니다. 또 바야흐로 봄에 가뭄을 근심하고 土脈이 윤택하지 않아 凶荒할 징조가 벌써 보이니 농사 풍흉을 점칠 수 있겠습니다. 災變이 겹쳐서 일어남이 지금같이 심한 적이 없었으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더욱 더 몸을 닦아 살피심을 더하십시오.” 그 뒤에 저녁 강의하실 때에 들어와 이르시기를 “漢나라 明帝 때에 하늘이 가물어서 種離意가 상소하여 간하니 명제가 즉시 營繕을 파하고 잘못한 것을 百官에게 일러주었더니 때에 맞추어 큰 비가 내렸습니다. 요즈음 재변이 있다 하여 주상께서 근심하시며 부지런히 慮하시고 스스로에게 죄를 주시는 말씀이 또한 간절하심으로 하늘이 때에 맞추어 비를 내리시니 이 일로써 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한다는 이치가 어긋나지 않으니 대개 안으로 진실되게 정성을 다하면 그 보답이 이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날이 다하도록 乾乾하고 밤에 若하기를 힘쓰면 허물이 없다.’하였습니다. <乾은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다는 뜻이요 若은 마음이 경동한다는 뜻이요 힘쓰니 허물이 없다하는 것은 변이 있으나 재앙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中庸에 이르기를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어서 시절을 편하게 하고 만물을 생육하게 한다.’하였으니 무릇 擧措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에 합하게 하기를 힘쓸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 화합하면 재변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讀書堂에서 글읽을 여가를 주셨다. 그 집은 한강 동쪽에 있으니 나라에서 인재를 儲畜하여 기르는 곳이다.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서 그 곳에 두고 두어 번 번갈아 가며 글을 읽히니 거기에 뽑힌 자는 영광스럽게 여기기를 신전에 오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들이 놀며 스스로 평안하게 지내는 이가 많았는데 선생께서는 늘 차례가 되면 가시고 글 읽기를 일삼으셨다. 남쪽 누각 왼쪽에 작은 집을 지어 이름을 文會堂이라 하였는데 해마다 서당의 모든 사람이 唱和하여 지은 글이 있었다. 4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시고 5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셨다. 咨文의 點馬官으로 義州로 가셨다. 義州雜詠이라 하는 글 열 두 절구가 있다. 부교리에 올라 재촉하여 부르시는 유지를 받들어 서울로 오셨다. 10월에 世子 侍講院 文學을 겸하시고 11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시고 12월에 病辭하셨으나 옮겨 成均館 典籍이 되시고 또 형조정랑이 되셨다.
1542년선생 42세
2월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시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3월에 경연에 들어가 주상을 모시고 글을 써서 아뢰기를 “한 시대의 흥함에는 반드시 한 시대의 규모가 있으니 東漢의 光武帝가 외척 등용을 숭상하지 않음에 그 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외척의 손에 말미암았습니다. 처음으로 창업하는 임금은 친히 규모를 세웠으나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하고 국사를 그릇되게 하는 것입니다. 章帝도 또한 어진 임금이었으나 그 때부터 외척의 전권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릇 史記를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다스려지고 어지럽혀지는 이유를 알고 보면 유익할 것입니다.”하셨다. 선생의 취미와 숭상하시는 것이 높고 깨끗하여 늘 물러나실 뜻을 두심으로 비록 영화로운 벼슬에 계셨어도 그것을 즐겨하시는 바는 아니셨다. 이 해의 봄에 玉堂에 속직하시며 매화를 생각한 시가 있었는데 이르기를<옥당은 홍문관이다.>

뜰에 한 그루 매화, 눈이 가지에 가득하였을 것인데
바람과 티끌의 회쉬와 바다를 꿈꿈에 끝이 분명하지 않도다.
옥당에 앉아서 봄밤의 달을 대하니
기러기 울음소리 가운데에서 생각나는 바가 있도다.

하셨다. 議政府 檢詳으로 어사되어 충청도로 내려가서 各官이 구황을 잘하고 못하는 것을 검찰하시고 4월에 復命하셨다. 주상이 인견하시고 구황의 形止를 물으시거늘 선생께서 아뢰시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쓸 預蓄이 삼년을 지내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하였는데 지금 한 해만 흉년이 들어도 공.사간에 모두 군색하고 결핍됨이 이와 같은데 올해 만일 또 失農하면 구황의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常時에 나라에서 쓰는 것을 節하고 저축하여야 비록 생각 밖의 재변이 있어도 窘急할 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셨다. 또 公州 判官 印貴孫이 悖戾貪汚하여 구황하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한 것을 아뢰며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주상께서는 이 말을 좇으셨다. 晦齋 李彦迪선생께서 경주에 근친가심에 南郊에 가서 전송하셨다. 5월에 通德郞이 되어 舍人에 오르시고 承文院 校勘과 侍講院 文學을 겸하셨다. 8월에 聾巖 李公<휘는 현보이다.> 이 고향으로 가시거늘 글을 지어 이별하고 災傷御史로 강원도로 가셨다. 過淸平山詩序를 지셨다. 10월에 司憲府 掌令이 되셨다.
1543년선생 43세
3월에 병환으로 사직하였으나 宗親府 典籤으로 제수되시고 또 장령이 되시어 계시다가 典設司守에 옮기셨다. 6월에 朝奉大夫가 되시고 7월에 成均館 司藝가 되시고 승문원 교감과 侍講院 弼善을 겸하셨다. 8월에 朝散大夫가 되셨다가 사간원 사간에 오르셨으나 병환으로 부임하지 못하시고 司僕寺 僉正으로 제수되셨다. 金厚之 수찬이 근친 말미를 얻어감에 글을 지어 보내셨다. 시에 이르시기를 되셨다. 6월에 成均館 典籍에 오르시고 中學敎授를 겸하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근친하시고 9월에 戶曺佐郞이 되셨다.

내 그대와 더불어 泮宮에 놀 때
말 한마디에 도가 합하여 서로 얻음을 기뻐하였다.
그대는 세상 살기를 빈 배같이 볼 줄을 알았고
나는 흩어진 재목이 樗과 같음을 믿노라.
부귀는 내게 뜬 구름과 같으니
우연히 얻었으나 내가 구하는 것은 아니로다.
가을 바람 소슬하게 한강 물에 부니
바다길 산길 천리에 그대 먼저 가는구나.

10월에 成均館 司成이 되시고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성묘하셨다. 11월에 禮賓寺 副正으로 제수되셨으나 가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뒤에 南冥 曺植께 보내신 편지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한갖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께서는 늙으셨으므로 친구들이 억지로 과거를 보아서 利祿을 취하라 하였는데 내가 그 때에 식견이 없어 문득 동요되어 우연히 천거하는 글에 이름이 올라 티끌 속에 골몰하여 날마다 겨를이 없었는데 그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후에 병이 더욱 깊고 또 스스로 세상에 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멈추고서 옛 성현의 글을 취하여 읽고 이에 然히 깨달음을 얻어 길을 고쳐서 桑楡의 景을 거두고자 하여 벼슬자리를 떠나서 옛 글을 안고 고향의 산 가운데로 돌아가 장차 더욱 못 미친 바를 구하는데 하늘 신령의 힘을 입어 조금씩 쌓아 남은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이 일생을 속절없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니 이는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원하는 일이다. 성은이 허물을 포용하시며 거짓 이름이 사람을 다그쳐 癸卯(1543)년에서부터 壬子(1552)년에 이르는 동안 세 번을 물러나왔으되 세 번 부르심에 다시 돌아갔으나 늙고 병든 몸으로 工程에 더한 것을 이렇게 하고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셨다. 또 鄭惟一의 言行錄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본래 벼슬할 마음이 적으셨는데다가 그때의 일에 큰 機關이 있음을 보시고 癸卯 (1543)년부터 물러나실 뜻을 결단하시니 이후로는 비록 여러 번 부르심을 입어도 조정에 계시지 아니하셨다.”하였다. 12월에 奉列大夫에 오르셨다.
1544년선생 44세
2월에 홍문관 교리로 부르셔서 서울로 가셨다. 독서당의 매화를 두고 지으신 글이 둘 있다. 4월에 世子 侍講院 左弼善을 제수받으셨으나 병으로 다니지 못하시고 사헌부 장령으로 계시다가 6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成均館 直講을 옮겨지셨다. 또 홍문관 교리가 되셨으나 병으로 체직되시고 종친부 전첨이 되셨다. 圭菴 宋麟壽가 북경으로 가거늘 주신 글이 있다. 8월에 홍문관 응교가 되시고 經筵 侍講官과 春秋館 編修官과 승문원 교감을 겸하셨다. 9월에 말미를 얻어 집에 와 계시다가 10월에 서울로 가셨다. 11월에 中宗께서 승하하시니 천조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아뢰고 시호를 청할 때 두 表文을 다 선생께서 지으시고 쓰셨다. 사신이 中朝에 들어가니 禮府官員이 글을 보고 매우 차탄하여 이르기를 “표문이 매우 좋고 필법이 또한 묘하다.”하였다. 사신이 돌아와 그 일을 아뢰니 명하여 선생께 말(馬)을 내리셨다.
1545년선생 45세
정월에 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셨다. 林士遂를 의주로 보내는 글이 있다. 3월에 병환으로 체직되고 內贍寺僉正에 옳기셨고 5월에 중훈대부가 되셨다. 6월에 홍문관 응교로서 典翰에 오르셨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7월에 인종께서 승하하시고 명종께서 즉위하셨다. 상소하여 왜인과의 화친을 허락하시기를 청하셨다. 이전 庚午년에 三浦에서 왜적이 난을 일으켜 邊將을 죽였기에 나라에서 柳聃年과 黃衡 등을 보내어 討平하고 이로 인하여 예를 거절하고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왜인이 화친함을 빌었으나 나라에서는 지난 일 때문에 다시 물리쳤다. 이 때에 나라에 큰 喪事가 있었고 선생께서는 왜적들이 그 틈을 타 여러 가지 화를 일으킬까 근심하시어 상소하셨는데 대략 말씀하시기를 “전번에 섬 오랑캐가 일으킨 變亂은 개나 쥐와 같은 도적에 불과했던 것으로 이미 도적의 무리를 죽여 물리쳤고 또 왜관에 머물렀던 자들을 쓸어 내쫓아 나라 위엄이 이미 진동하였고 왕법이 또한 바로 잡혔습니다. 저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고쳐 머리를 숙여 불쌍히 여기심을 빌며 꼬리를 흔들어 가련히 여겨줄 것을 비니, 왕의 도가 넓고 넓어 간사한 것을 미리 짐작하지 아니하며 미덥지 못한 것은 억측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옳은 마음으로 온다면 이에 받을 따름입니다. 지금 天變은 위에서 보이고 人事는 아래서 빠져서 큰 화가 거듭되고 나라 안이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어떠한 시절입니까? 또 나라에서는 북쪽 오랑캐와 더불어 틈이 생겼으니 만약 남북의 두 도적이 일시에 발하면 무엇을 믿고 막겠습니까? 들으니 조정에서 禮로 청하는 것을 끊는다 하는데 마음에 이상하게 여겨져 탄합니다. 이 일은 백년사직에 관계되는 근심이요 억만 백성의 목숨에 관계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신의 이 글로써 慈殿께 취품하시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의논하시고 절충하고 살펴서 처리하십시오.”하셨다. 8월에 中直大夫에 오르셨으나 병으로 홍문관 직을 사양하여 通禮院相禮로 계시다가 9월에 司饔院正에 제수되시고 홍문관 전한으로 제수되시니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10월에 李가 계청하여 선생의 직위를 삭탈하였다. 이 때에 權奸이 일을 일으켜 士禍가 크게 일어나죽고 귀향간 사람이 계속 잇달았으니 사람이 모두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右相 이기는 더욱 凶險하여 여론이 자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다 몰아내어 모든 입을 箝制하고자 하여 대궐에 홀로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죄 정하기를 각각 맞게 하였으나 朝士들 중 坐罪하여 파면될 자가 아직 미진한 것이 있으니 청하옵건대 李天啓와 李滉과 權勿과 李湛과 丁 등을 파직하시기 바랍니다.”하여 선생께서 그 사람들과 같은날 삭직당하시니 朝夜의 사람들이 놀라고 통분히 여겼다. 12일에 仁廟의 梓宮을 陵으로 발인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셨기에 홀로 들 밖에 가서 望哭하시고 예를 행하셨다. 주상께서 명하여 職牒을 도로 주셨다. 이기의 조카인 李元祿은 본래 선생을 중히 여겼기에 林百齡은 이기의 黨 사람으로 또한 기에게 말하기를 “이황이 근신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아는 것이니 지금 그 사람을 죄주면 지난 날에 죄입은 사람도 다 거짓 일로 잡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이기가 다시 대궐에 나아가 전번의 啓辭에 살피지 못한 것을 사죄하고 도로 직첩을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敍用하여 司僕寺正에 제수하고 承文院 參校를 겸하게 하셨다. 11월에 통훈 대부가 되시고 迎接都 監郞廳으로 임명되셨다.
1546년선생 46세
2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外舅 權을 장사지내셨다. 5월에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시어 해직되셨다. 7월 초2일부인 권씨께서 돌아가셨다. 8월에 校書館 校理로 제수되시고 승문원 교리를 겸하셨다. 11월에 禮賓寺正이 되셨으나 모두 가지 않으셨다. 養眞菴을 퇴계 동쪽 바위 위에 지으셨다. 이전에 작은 집을 온계 마을 남쪽의 芝山 북쪽에 지었으나 마을이 많아 고요하고 아늑하지 않다고 하시고 이 해에 비로소 退溪 아래 수삼리쯤에 假寓하시고 동쪽 바위 곁에 작은 집을 지어 이름을 養眞이라 하셨다. 그 시냇물의 속명은 兎溪인데 선생이 물러갈 ‘退’자로써 토끼 ‘兎’자를 고치시고 인하여 스스로 별호로 삼으셨다.
1547년선생 47세
7월에 안동 부사를 제수받으셨으나 가지 않으셨다. 8월에 홍문관 응교를 제수하시고 예전대로 겸직하여 부르시므로 서울로 가셨다. 12월에 병으로 사양하시니 儀賓府 經歷으로 제수되셨다. 이 때에 나라의 의논이 더욱 怪慮하여 兩司와 홍문관이 서로 글을 올려 鳳城君에게 죄주기를 청하거늘 선생께서는 힘으로 능히 구하지 못할 줄을 아시고 병으로써 사직하셨다.
1548년선생 48세
정월에 외임을 구하신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청송을 구하시다가 얻지 못하시고 단양군수가 되시니 글을 지어 이르시기를 “청송과 백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푸른 물과 丹山은 진실로 인연이 있도다.”하셨다. 선생께서 고을을 다스리시기를 誠信으로 하시며 墾惻하시고 다스림이 淸簡하시니 아전과 백성이 다 편하게 여겼다. 고을에 奇勝한 땅이 많았는데 龜潭과 島潭 같은 곳이 더욱 아름다웠다. 선생께서 공사하신 겨를에는 놀고 읊으시고 구경하셨는데 蕭然히 세상 밖에 나간 듯한 자취가 있었다. 단양에서 산수가 놀만한 곳 기록한 것을 말한 것과 二樂樓와 花灘 등이 지으신 글에 있다. 2월에 아드님 寀의 상사를 들으셨다. 8월에 향교에 釋奠하셨고 9월에 말미를 얻어 집에 돌아와 성묘하셨다. 10월에 형 대헌공이 충청감사가 되시니 단양이 그 도내에 있으므로 풍기군수로 옮기셨다.
1549년선생 49세
2월에 향교에서 釋奠禮를 행하였다. 한식날 선영에 성묘하셨다. 4월에 小白山을 유람하셨다. 9월에 감사에게 辭狀하시고 10월에 감사께 글을 올려 白雲洞 서원의 扁額과 서책을 청하시니 감사께서 啓問하여 頒降하셨다. 백운동은 고을 북쪽 소백산 아래의 竹溪 위에 있는데 前朝 때 文成公 安裕께서 예전에 사셨던 땅이다. 周世鵬이 그 땅의 군수가 되었을 때 서원을 그 곳에 처음으로 지어 문성공을 제사하고 모든 선비들이 머물면서 배우는 곳으로 삼았었다. 선생께서 생각하시기를 동방에는 옛날에 서원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처음으로 생겼으니 가르치는 것이 위에 말미암지 않으면 다시 폐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사께 글을 올려 청하여 위에 아뢰어 송나라 때의 옛 일에 의거하여 서책과 서원 편액을 내려주시고 田地와 종을 겸하여 주어 학자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셨다. 감사 沈通源이 조정에 아뢰니 이에 이름을 紹修書院이라 하시고 대제학 申光漢을 시켜 記를 짓게 하고 四書와 五經과 性理大全 등의 책을 주시니 서원의 일어남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감사께 세 번을 사장하여 벼슬을 해임해 주기를 청하셨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오시니 行裝이 쓸쓸하여 서책 두어 상자일 따름이었다.

1550년~

1550년선생 50세
정월에 마음대로 임소를 버렸다 하여 파직당하셨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卜居하셨다. 이보다 먼저 河明洞 紫霞奉 아래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하고 竹洞에 옮겨 계시다가 또 골이 좁고 시내가 없다 하여 溪上에 옮기시니 세 번 옮겨 定居하신 것이다. 寒栖菴을 지으시고 堂 이름을 靜習이라 하고 그 가운데서 글을 읽으셨다. 시를 지어 말씀하시기를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가 편안하고
학문이 물러가니 暮境이 근심이로다.
시내 위에 비로소 정거하니
흐르는 물에 임하여 날로 살핌이 있도다.

하셨다. 이로부터 쫓아오는 선비가 날로 많아졌다. 聾巖 李公을 汾川에 가서 뵈었다. 4월에 光影塘이란 못을 팠는데 못이 한서암 앞에 있으니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배회한다고 하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으신 것이다. 8월에 형 左尹公 瀣의 부음을 들으셨다. 좌윤공께서 전에 사헌부에 계실 때에 李가 정승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의논하였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기의 모함에 빠져 매를 맞고 귀양가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1551년선생 51세
이 해에는 선생께서 벼슬을 하지 않으시고 집에 계셨다. 3월에 安東 馬鳴洞에 가서 선조 분묘에 성묘하셨다.
1552년선생 52세
입춘에 지으신 시가 두 수 있는데 그 중 한 시에 이르기를

누른 책 중간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여
밝은 한 집에 초현히 앉았도다.
매화 창에서 또 봄 소식을 보니
보배로운 거문고를 향하여 줄 끊어진 것은 탄식하지 말라.

하셨다. 聾巖을 臨江寺로 찾아가서 지으신 글이 있다. 4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記注官, 승문원 교리로 부르시니 서울로 가셨다. 5월 초 8일에 입시하여 進講하실 때 글을 써서 아뢰기를 “積善하는 집은 남은 경사가 있고 積不善하는 집은 반드시 남은 殃禍가 있나니 무릇 사람이 악한 일을 할 때에 스스로 그 일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겠지만 그 악이 점점 쌓여 마침내 큰 화에 이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진 일을 쫓음은 올라가는 것 같고 악을 쫓음은 내려가는 것 같다.’하였으니 위로 제왕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마땅히 정히 살피며 굳게 지키어 中正한 도를 잡으라 하는 성인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 한결같이 지키고 사사로운 것을 섞이지 않게 하면 사특한 念慮가 저절로 미치지 아니하며 그 마음가짐의 바르기가 한결같을 따름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公과 私와 義와 利의 분별을 살펴 염려하십시오.” 하셨다. 司憲府 執義로 임명됨에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6월에 동료와 더불어 箚子를 올려 일을 의논하시고 병으로 辭狀하셨으나 弘文館 副應敎로 옮기셨다. 7월에 通政大夫 成均館 大司成에 오르셨다. 그 때에 대사성이 비었기에 吏曹에서 대신의 뜻으로써 堂下官 중에서 글 잘하고 재주와 행실있는 사람을 택하여 擬望하기를 계청하니 선생께서 首望으로 추천되어 오르셨다. 愼齋 周世鵬의 遊淸凉山錄의 跋을 지으셨다. 11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上護軍이 되셨다.
1553년선생 53세
4월에 대사성이 되셨다. 임금께서 학교가 폐하고 해이하다고하여 勸學하는 節目을 내리시어 다시금 밝혀 거행하도록 하시니 선생께서 사양하여 사임하시고 다시 師丈을 택하여 맡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四學에 通文하여 <사학은 南學, 西學, 中學, 東學이다.> 모든 선비를 깨우치니 대강 이르시기를 “학교는 風化의 근원이요 착한 것을. 따르는 곳이며 선비는 예의의 주인이고 元氣가 붙어 있는 곳이다. 나라에서 학교를 베풀어서 선비를 가르치는 것은 그 뜻이 매우 중한 것이다. 스승과 선비 사이에는 마땅히 예의로써 서로 먼저하여 스승은 엄하고 선비는 공경하여 각각 그 도를 다할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선비는 무릇 일상의 음식먹는 것을 예의 가운데서 주선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 또 서로 계획하고 가다듬기를 힘써 옛 습관을 씻어 버리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미루어 나가서는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으며 안으로는 효제를 행하고 충신을 으뜸으로 하여 나라에서 문교를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기 위해 학교를 열어 선비를 가르치는 뜻에 보답해야 합니다.” 6월에 學田을 주셨기에 모든 선비를 거느리고 글을 올려 사례하셨다

7월에 대왕대비께서 정사를 왕께 돌려 보내시는 교서를 지어 올리셨다. 병으로 사직하셨으나 副護軍으로 제수되셨다. 8월에 親試하시는 과거의 對讀官이 되셨다.

9월 丙申일에 景福宮이 불에 타서 종묘를 慰安하는 제문을 지어 올리셨다. 忠武衛上護軍이 되셨다. 洪應吉의 遊金剛山錄의 서를 지으셨다.

10월에 鄭之雲의 「天命圖」를 고쳐 정하셨다. 之雲의 자는 靜而요 별호는 秋巒이다.
「천명도」를 지었거늘 선생께서 그를 위하여 고쳐 정하고 그 뒤에 서를 쓰시니 대강 말씀하기를 “내가 벼슬하기 시작할 때 한양 서쪽 성문 안에 우거한 지 20년이나 이웃에 있는 鄭靜而와 더불어 서로 알고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천명도」라 하는 것을 얻었는데 그림과 말이 잘못 그린 것이 있거늘 사람을 시켜 정이에게 청하여 정이의 本圖를 보라고 청하였다. 얼마 안 있어 또 정이 보기를 청하니 서너 번 왕복한 후에야 허락하였다. 정이가 말하기를 ‘慕齋와 思齋 두 선생의 문하에 가서 배우면서 그 의논을 들었으나 성리학은 미묘하여 밝힐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하다가 시험삼아 주자의 말씀을 취하고 다른 모든 말로써 相參하여 한 그림을 만들어 선생께 質疑하여 그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쌓은 공부가 아니면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이르시거늘 그 후에 내 스스로 잘못된 것을 깨달아 고친 것이 많으나 아직도 정한 것이 없습니다.’ 하거늘 내가 이르기를 ‘두 선생께서 가벼이 의논하지 않으신 것은 진실로 반드시 깊은 뜻이 계셨기 때문이나 지금 우리가 학문을 강구하다가 매일 未安한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어찌 한갖 구차히 같이 하며 굽히고 덮어 마침내 그 옳은 것을 분변하지 않겠는가?’하고는 周濂溪가 만든 태극도와 그 말을 인증하고 지적하여 이르기를 ‘어떤 곳은 잘못되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어떤 곳은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떠한가?’하니 정이가 말을 다 듣고 즉시 옳게 여겨 성내는 빛이 없고 오직 황의 말이 마땅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힘써 분변하여 지극히 마땅한 것에 돌아간 후에 그치고 전라도 선비 李恒이 의논하여 情은 氣의 권역 가운데 두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 취하여 여려 장점을 모은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두어달 만에 정이가 고친 그림과 그에 붙은 말을 가지고 와 보이거늘 다시 서로 같이 상참하고 교정하여 비록 잘못된 곳이 없는지 있는지를 알지 못하나 우리들의 소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다. 이에 좌우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잠심하여 살펴 玩味하니 그림으로 인하여 깊은 속을 밝혀내어 조금이나마 유익함이 있을까 한다.” 하셨다.
1554년선생 54세
2월에 東宮의 上梁文을 지으셨다. 5월에 형조참의가 되시고 6월에 병조 참의로 옮기셨다. 7월에 周愼齋의 訃音을 받고 우셨다. 盧伊齋<守愼>에게 편지하여 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의논하셨다. 그 때에 이재가 진도에 귀양가서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거늘 선생께서 편지하여 의논하시니 대강 이르시기를 “숙흥야매잠을 옛날부터 일찍이 가슴에 담아들었으나 아직도 조리의 치밀함과 공부의 엄함이 이같이 지극한 줄은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주해를 얻어 보니 章을 나누며 句를 분석하였고 정한 뜻과 높은 의논이 중요한 곳에 넓게 놀며 홀로 밝고 넓은 근원에 이른 것을 차탄하여 감복하기를 이기지 못하나 다만 그 사이에 두어 군데 의심되는 것이 없지 않아 삼가 다 내어 쓰니 바로잡아 주기 바랍니다.”하셨다. 경복궁의 새로 수리한 모든 편액 글자를 쓰셨다. 延平答問에 발을 지으셨다. <이 책은 송나라 선비 延平先生이 주자의 묻는 말에 대답하신 글이다.> 청주 목사 李楨이 새로 새기고 발을 청하므로 지으셨다. 9월에 체직하여 상호군이 되셨다.

10월에 思政殿에 大寶箴을 써 올리셨다. 11월에 上舍 洪仁祐의 죽음에 우셨다. 선생께서 남에게 편지하여 이르시기를 “이 사람이 학문이 있고 문장에 능하더니 문득 죽음에 이르니 늘 깊이 탄식하고 아까워한다.”하셨다. 첨지 중추부사가 되셨다. 12월에 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시니 주상께서 馬을 하사하셨다.
1555년선생 55세
2월에 康寧殿에다 七月篇을 써 올리셨다. 병으로 세 번 사양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즉시 성 밖에 나가 배를 세내어 동으로 돌아가셨다. 이날 상호군이 되셨다. 첨지 중추부사를 제수하시고 食物을 주시고 諭旨하여 부르시며 서울에 와서 의원에게 보이라고 하심에 글을 올려 사은하시고 소명을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 듣지 않으시고 5월에 다시 부르셨다.

선생께서 돌아오신 후에 李龜壽가 아뢰기를 “이황은 병으로 고향에 돌아간 지가 거의 한 달이나 되었는데도 위에서 알지 못하시니 옛날에 이른바 ‘이전에 등용된 자가 오늘 그 나간 바를 알지 못한다.’하는 것이 이 경우를 말한 것일 것입니다. 이황은 문장과 操行이 있으나 산야에 恬退하였으니 이 사람을 숭상하여 권장하시면 선비의 풍습을 북돋워 가다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고 申汝悰이 또 아뢰기를 “서울에 있으면 의원을 찾아가서 약을 쓰기가 편할 것이니 이황을 올라 오게 하십시오.”하였다. 이에 다시 僉知를 제수하고 명하여 부르셨다.
선생께서 글을 올려 사례하는 뜻을 진술하시고 병이 들었으니 벼슬을 해임해 주시기를 청하셨다. 얼마 후에 鄭惟吉이 아뢰기를 “이황은 학술과 재주가 있으니 한 시대에 인재는 한정이 있는데 이같은 사람이 또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두 번 부르실 때 유지에 이르시기를 “그대의 재주가 文翰에 오르고 淸謹한 덕을 갖추었기에 바야흐로 서울에 두고 顧問을 갖추고자 하였는데 어찌 한 병으로 갑자기 향촌으로 물러가시는가? 이제 狀辭와 사례한 箋文을 보니 내마음이 섭섭하도다. 안심하고 조리하여 늦고 빠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셨다. 家廟에 祭하여 恩賜가 계신 것을 고하셨다.

6월에 聾巖께서 별세하셔서 그 집에 가 우시고 행장을 지으셨다.
先 김씨.박씨의 墓標를 지으셨다. <선생께서는 박씨에게서 나셨고 김씨는 전의 모친이시다> 겨울에 淸山에 들어가서 달이 넘은 후에야 돌아오셨다.
1556년선생 56세
5월에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가 되시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부르심을 받으셨다. 이전의 좌상 尙震이 趙士秀와 같이 경연에서 선생을 부르기를 청하니 주상께서 御札로써 부르시기를 “그대는 탁월하여 맑고 간결하며 세상에 없는 문장으로 공명을 탐내지 않아 촌향에 한가하게 있으니 그 恬退하는 節을 아름답게 여겨 늘 서울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으나 내가 어진 사람을 구하는 정성이 없어서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니 내마음이 缺然하다. 내 비록 尙文의 덕이 없으나 그대는 어찌 富春에 숨어 살기를 좋게 여기는가? <尙文은 어진 임금이요 부춘은 옛날에 嚴子陵이 숨었던 곳이다> 빨리 올라와 벼슬하여 내 간절히 구하는 뜻에 응하라.” 하시고 食物을 주시고 얼마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고 또 부르셨다.

6월에 첨지 중추부사를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정과 뜻이 간절하므로 마지못해 따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셨다. 朱子大全에 있는 서찰은 다 공경과 대부와 제자들과 아는 사람과 더불어 往還에 따라 묻는 것을 대답하는 말씀으로 선생께서 각각 사람의 材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억제하고 높여주시며 인도하시며 구하신 것이어서 더욱 학자에게 切當하나 분량이 많아 그 자취를 궁구하기 쉽지 않다고 하시고 학문에 깊이 관계하고 받아쓰기에 적당한 것을 뽑아서 책을 만드시고 이름을 『朱子書節要』라 하셨다.
8월에 族人을 모아 안동땅에 계신 고조 증조의 분묘에 제사 지내셨다.
9월에 온계에 있는 모든 친척과 더불어 落帽峰에 오르셨다.
12월에 鄕約을 초하셨다. 이 때에 나라에서 鄕徒하라고 하시는 명이 계셔서 선생께서 향약을 초하셨으나 다른 일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지으셨다.
1557년선생 57세
3월에 樹谷菴記를 지으셨다. 수곡은 선생의 선영이 계신 곳이다. 서당의 터를 도산 남쪽에 얻으셨다. 다시 서당터를 얻으시며 느끼신 글 두 수와 다시 도산 남쪽 골에 가셔서 보신 글이 있다.
4월에 太紫山에 놀면서 大方洞을 찾으셨다.
7월에 『啓蒙傳疑』란 책을 완성하셨다. 선생께서 지으시니 대강 말씀하시기를 “理와 數의 학문은 <이는 주역이요 수는 河圖洛書八卦를 그린 수다.> 넓고 크며 묘하며 궁구하기 쉽지 않으며 혹 세상에 드문 책에서 나온 말이 많으니 반드시 다 상고하고 의논한 후에야 그 뜻을 알 수 있고 깊이 숨은 뜻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더하며 더는 법을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혹 생각하여 맞음이 있거나 혹 예를 상고하여 증거되는 것이 있으면 좇아가며 가끔 기록하여 상고해 보기를 편리하게 하였다.”하셨다.
1558년선생 58세
3월에 滄浪臺를 쌓으시고 <후에 天然臺라 고쳤다> 4월에 鼇潭에 가 노셨다. 祭酒 禹倬을 위하여 서원을 오담 위에 짓고자 하여 그 터를 보셨다.
6월에 魚灌圃의 시집에 跋을 지으셨다. <관포는 魚得江의 별호이다> 윤 7월에 상소하여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御批를 내려 허락하지 않으시니 부르심을 입고 서울로 가셨다. 이전 6월에 영의정 沈連源과 대제학 鄭士龍이 경연에서 아뢰어 서울의 벼슬을 줄 것과 감사로 하여금 권하여 올려 보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이를 들으시고 상소하여 병이 들어 벼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극진히 진술하셨는데 대강 이르시기를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어려서부터 임금님을 섬기는 도리를 들어 배웠는데 어찌 말에 멍에 메우기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 공순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구태여 한 구석만을 지켜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고 의심을 쌓아가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나아감이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을까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의라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에 마땅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것을 숨기고 벼슬을 도적질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병폐하여 헛 녹만 먹는 것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헛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잘못된 것을 알면서 冒諂하여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소임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물러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조정에 있으면 그 신하된 의에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이 사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살피시고 신의 병이 심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의 벼슬로써 田里에 물러가서 허물을 고치며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해주십시오.” 하시니 주상께서 어찰로 대답하시기를 “이번 상소의 사연을 보니 전후에 물러나는 일을 구하던 일을 기록하여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것을 진술하면서까지 굳게 고집하니 비록 어진 사람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나 어찌 그 뜻을 빼앗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적고 밝지 못하고 그대는 또한 생각이 없어서 도를 지키고 의를 지켜 결단하여 와서 도울 뜻이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우니 마땅히 내 뜻을 알라.”

하셨다. 이에 선생께서 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시어 9월 그믐달 입성하셨다.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불러 政院에 나오라고 명하시고 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인데 퇴폐함이 심하고 士習을 마땅히 길러 바르게 할 것인데도 浮蕩하여 아름답지 않으니 비록 내가 불민하여 고무하여 교화하지 못한 탓이기는 하나 어찌 또한 師長에게도 관계가 없겠는가? 그대는 글이 능하고 淸謹하여 가르칠 소임에 합당하므로 내가 그대에게 맡기니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히 가르쳐서 학교를 振起하게 하며 士習을 바르게 하라.” 하시고 貂皮의 귀마개를 주시니 선생께서 아뤼기를 “신이 병이 심하여 전에 두 번이나 이 소임을 맡았으나 다 감당하지 못하였는데도 지금 소임을 또 맡게 되니 전같이 감당하지 못할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셨다. 또 명하여 술을 하사하셨다.
11월에는 병으로 사양하시니 갈아 상호군을 제수하셨다.
12월에 어필로 특별히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올리셨으나 병으로 사양하셨다. 다 듣지 않으시므로 그 때에야 마지못해 숙배하시고 힘써 사양하셨으나 듣지 않으셨다.
1559년선생 59세
2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焚黃하시고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셨으나 듣지 않으셨다. 이때에 선생께서 분황 때문에 물러나와 돌아가지 않으시니 혹 의심하여 묻는 자가 있음에 선생께서 편지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도 매우 부득이 한 것에 이르면 또한 다른 일을 빌어 거취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임금 섬기는데 성실하지 않아 그러하겠습니까? 싫어하는 것이 가탁하는 것보다 심한 까닭입니다. 더구나 내가 분황으로 말미를 청한 것은 법례를 좇은 것이고 병으로 조정에 돌아가지 못한 까닭에 물러남을 빌었는데 어찌 이것이 일을 가탁하여 성실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사람이 옛 일을 깊이 상고하지 않고 사람을 꾸짖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하셨다.

5월에 또 사직하시니 듣지 않으셨고 7월에 또 사직하시니 주상께서 勉强하여 허락하시고 참판으로 갈으시고 동지중추부사에 옳기셨고 本道로 하여금 食物을 주라고 하셨다. 黃仲擧의 편지에 대답하여 白鹿洞規集解를 의논하셨는데 이것은 松堂 朴英이 지은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어 선생께서 분변하여 해석하셨다. <仲擧는 錦溪 黃俊良의 字요 백록동규는 주자께서 만드신 백록동서원 규식이요 집해는 박송당이 해석한 글이다>이 伊山書院記를 지으시고 집 이름을 쓰시고 그 서원의 선비를 가르치는 규식을 정하셨다. 12월에 처음으로 송말과 원과 명의 理學通錄을 편찬하셨다. 주자 이후로 도를 공부하는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기록한 것이 흩어져서 각각 나오므로 그 말이며 의논한 것이 같고 다른 것과 옳고 그른 것과 학문의 얕고 깊은 것과 소활하며 주밀한 것을 다 보지 못하니 학자들이 병으로 여기므로 선생께서 朱子書와 語類와 實記와 史傳과 一通志 등의 책에 의거하여 그 말씀이며 행실이며 사적을 캐어내어 각각 종류대로 분류하여 송나라가 남으로 건너간 뒤부터 원과 명에 이르렀으니 서명은 이학통록이라 하시고 그 陸學을 하는 자에게는 기록하여 각별히 外集을 만들어 그 아래 붙이시니 학술이 통일된 것이 있었다. <어류는 주자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요 실기는 주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요 사전은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기록한 글이요 일통지는 대명 때의 책 이름이요 학술은 선비의 배우는 법이요 통일은 배우는 일이 정한 곳을 한 데 모아 갈리지 아니한 것이요 육학은 陸象山의 학이 佛家에 가까워 옳은 듯하나 그른 학이요 이학통록이란 말은 이학하였던 사람을 다 통하여 기록한 책 이름이다>

1560년~

1560년선생 60세
정월에 南冥 曺植의 遊頭流錄의 跋을 지으셨다.<남명의 성명은 조식이요 유두류록은 남명이 두류산에 遊山하여 기록한 글이니 끝에 의논한 말에 잘못된 것이 있으므로 선생께서 辨正하여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셨다> 11월에 奇高峯에게 답장하여 四端七情을 의논하셨다.<기고봉은 선생의 제자이다. 四端이란 말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이니 인과 의와 예와 지를 말하는 것이다. 理는 性으로 불쌍한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기는 것은 惻隱한 마음이니 仁으로 동하여 난 끝이요 사나운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며 애처로와하는 것은 羞惡하는 마음이니 義로써 동하여 난 끝이요, 辭讓하는 마음은 禮로써 동하여 난 끝이요 是非하는 마음은 智로써 동하여 난 끝이니 이것이 四端이다. 기쁜 일을 보면 기뻐하는 것이 喜요 노하는 일을 보면 노하는 것이 怒요 슬픈 일을 보면 슬퍼하는 것이 哀요 두려운 것을 보면 두려워 하는 것의 懼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愛요 싫어하는 것을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惡요 하고자 하는 마음은 欲이니 이것이 七情이다. 사단과 칠정이 다 마음에 느껴서 동하는 것이나 사단은 理에 붙어 있어 순하고 선하여 악이 없는 것이고 칠정은 氣에 속해서 본래는 선하나 악으로 들기 쉬운 것이다. 선생께서 천명도를 수정하실 때 사단은 이에 붙이시고 칠정은 기에 붙여 도에 올려 놓으셨다> 기대승 명언<기고봉의 자이다>이 그것을 보고 “사단과 칠정은 본래 한 가지 정이니 이와 기로 나누어 속한 것이라고 한 것은 너무 심하고 이와 기가 잘라져 두 가지 物이 되며 칠정이 이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고 한 말뜻에 병폐가 없지 않습니다.” 하며 선생께 글을 올려 분변함에 선생께서 대답하시니 대강 말씀하시기를 “사단은 정이요 칠정도 또한 정이니 다같이 정인데 어떻게 해서 사단과 칠정의 다른 이름이 있겠는가? 來喩의<기고봉이 편지에 했던 말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나아가 말한 바가 같지 않다.’ 한 것입니다. 대개 이와 기는 본래 서로 힘입어 體가 되었고 서로 힘입어 用이 되니 진실로 이가 없는 기는 있지 않으며 기가 없는 이도 있지 않다. 그러나 나아가 말한 바가 갖지 않으면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또 性이라는 한 자로써 말하자면<성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자사께서 말씀하신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하는 것과 맹자께서 말씀하신 性善의 성이니 이 두 성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와 기를 사람이 타고 나서 하늘이 주신 가운데로 나아가 이 理의 근본이 본래 그러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가르킨 바가 理에 있고 氣에 있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에 말미암아 순선하여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理와 氣가 서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으로 氣를 겸하여 말을 한다면 이미 이것은 性 본연의 것이 아닐 것이다. 자사와 맹자께서 道體의 전부를 환하게 보심으로써 그 말을 주장하기를 이같이 한 것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기를 섞어 성을 말한다면 성 본래의 어진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程. 張의 諸子에 이르러 부득이 氣質之性이라 하는 의논을 둔 것은 또한 남보다 낫기를 구하여 다른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지적하여 말한 것은 사람이 타고난 후의 것이 있으므로 본연의 그러한 성으로써 섞어서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愚妄이 보건대<선생께서 겸사하시는 말씀이다> 정이 사단과 칠정으로 나누어짐이 있는 것은 성의 본성과 기품이 다름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하면 성을 이미 이와 기로써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에 이르러 홀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하지 못하겠는가? 측은과 수오와 사양과 시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하여 나오는 것이다. 喜, 怒, 哀, 懼, 愛, 惡, 欲은 어디로부터 발하는가? 그것은 밖의 物이 그 얼굴에 부딪히면 속에서 동하여 지경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사단이 발한 것을 맹자께서 이 마음이라고 하셨는데 마음이란 것은 진실로 이와 기가 합한 것이다. 그러나 지적하여 말한 바가 이를 주재함은 어찌된 것인가? 인의예지의 성이 粹然히 속에 있어 네 가지는 그 끝이다.<수연은 섞은 것이 없이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칠정이 발함을 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에서 발한 것이라고 하셨고 朱子 또한 말씀하시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신 즉 진실로 또한 이와 기를 겸한 것이다. 그러나 지적하여 말한 것이 기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외물이 오는 것은 느끼기 쉽고 먼저 움직이는 것은 形氣와 같은 것이 없으니 이 일곱 가지가 그 苗脈이다.<외물은 밖으로서 오는 일을 말하는 것이니 기뻐하는데 기뻐하고 노한 일 보면 노하는 일곱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형기는 사람의 얼굴과 기를 말하는 것이요 묘맥은 곡식의 갓 돋아 나는 싹이며 사람의 맥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사단이 다 어질기 때문에 ‘네 가지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하며 ‘정은 선이 될 수 있다.’ 하셨고<맹자의 말씀이다> 칠정은 본래 선한 것이나 악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그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말하고<자사의 말씀이다> 한 번 마음이 있고서 능히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벌써 그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이다고 하니<주자의 말씀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이 두 가지는 자주<이 두 가지는 사단과 칠정이다> 비록 이와 기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하나 그 좇아온 바에 인하여 각각 주장한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이요 어떤 것은 기라 말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의 학문은 바르고 미묘한 극치로 반드시 크게 마음을 두며 높이 눈을 붙여 일제히 먼저 한 가지 말로써 주장을 삼지 말고 마음을 비워 기운을 편하게 하여 천천히 그 의에 돌아가는 것을 보아 같은 것 가운데에 나아가 그 다른 것이 있는 줄을 알며 다른 것 가운데에 나아가 그 같음이 있는 줄을 알아 나누어져 둘이라 하여도 그 일찍이 떠나지 않는 것이 문제되지 않고 합의하여 하나라 하여도 실로 서로 섞이지 않는 데에 돌아가 주변하고 자세하여 일편됨이 없을 것입니다.<일찍이 떠나지 않았다 하는 것은 이기가 가운데서 갈라지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요 서로 섞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비록 이기가 합하여 있어 다른 것이 없는 듯하나 그 가운데에 이는 이요 기는 기니 서로 섞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분변하는 바는 이것과 달라 합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떠나는 것을 미워하며 渾全한 것을 즐기고 剖析함을 싫어하며<혼전은 하나인데 합하여 혼동이 일어난 것이요 剖析은 갈라 분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의 좇아온 바를 궁구하지 않고 대체로 이와 기를 겸하며 선과 악이 있다 하여 깊이 분변하여 말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이는 바로 羅整庵이<나정암은 大明 때의 선비이다> 이와 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을 처음으로 하여 주자의 말씀이 옳지 않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나 나는 尋常히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내유에 한 뜻이 또한 이와 같은 줄 생각하지 못했다.<내유는 기고봉 편지의 말이다> 무릇 학문을 강구하나 분석함을 싫어하고<분석은 부석이라 하는 말과 같다> 합하여 하나라고 하는 말을 옛 사람은 말하기를 呑棗라 하니 그 병폐가 적지 않다고 하였으니<골륜탄조는 대추를 씹지 않아 그 맛을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然히<점점이다> 기로써 성을 의논하는 데에 가리워짐에 들어가서 인욕<사람의 욕심이다>을 하늘의 이치로 잘못 아는 근심에 떨어질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보내온 편지를 받은 즉시 어리석은 소견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래도 스스로 내 소견이 옳아 의심이 없어질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오래도록 보내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朱子語類를 보니<어류는 주자의 말씀을 종류대로 기록한 책이다> 맹자의 사단을 의논하신 끝의 한 조목에 정히 일을 의논하시니 그 말씀에 이르시기를 ‘사단은 이것이 理에서 발한 것이요 칠정은 이것이 氣에서 발한 것이다.’ 하였으니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감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스승을 믿는구나.’ 하였으니 이 주자의 말씀을 얻은 후에야 바야흐로 어리석은 소견이 크게 잘못되지 않은 줄을 믿어 감히 주자의 말씀을 粗述하여 구구히 써 가르침을 청하노라.” 하셨다. 奇明彦이 또 조목 조목 분변하여 의논을 여러 번 왕복함에 선생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리를 분석하고 정하고 넓힘이 진실로 마땅하나 돌아보건대 그 의논하는 조건과 끝이 번거러워 잡되고 말씀이 散漫하여 왕왕 임시로 先儒의 말씀을 채취하여 자신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여 대답하니 분변하는 말을 하는 것이 과거를 보는 擧子<으뜸 재주>가 場中에 들어가서 글제를 본 후에 옛 사실을 얻어다가 대답하는 자료로 삼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설사 십분 옳고 마땅하다 하더라도 자기의 몸에는 一毫도 받들어 가까운 것이 없으면서 다만 속절없이 다투는 것이니 聖門에서 크게 금하는 것을 범할 뿐이거늘 하물며 참으로 옮음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뜻을 일으켜 받들어 대답하기를 전같이 선뜻 하지 않았다.”하셨다. 그 후에 명언이 전의 소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 자기의 말을 버리고 선생을 좇아 사단칠정이란 글을 지어 말하기를 “맹자께서 사단을 논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할 줄 안다.’고 하셨으니 확충할 줄을 알 것이다. 무릇 이 사단을 두고 확충하고자 한 즉 사단이 이 理로 발한 것은 진실로 그러한 것이고 정자가 칠정을 의논하여 말씀하시기를 ‘정이 이미 성하여 더욱 방탕하면 그 성이 상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정을 절약하여 중도에 맞게 하여야 한다.’ 하셨으니 무릇 칠정이 성하여 더욱 방탕함으로써 그것을 절약하여 그 중도에 합하고자 한 즉 칠정이 이 氣에서 발한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 일로써 본다면 사단과 칠정이 이와 기로 나누어 속함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이 한 해의 일이 아니나 분변하여 의논하시던 시말과 나중에歸宿한 곳을 보는 사람이 알고자 하므로 이에 기록하였다.
도산 서당을 다 지으셨다. 이로부터 별호를 陶翁이라 하셨다. 집이 삼간이다. 헌은 巖栖軒이요 재는 玩樂齋이다. 精舍는 일곱간이니 이름을 雲이라 하셨다. 선생께서 늘 도산에 이르러 항상 안락재에 계실 때에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굽어 읽으시며 우러러 생각하시기를 밤으로써 낮을 이으셨다. 집이 가난하여 蔬로<속에서의 쌀이다> 겨우 끼니를 이으셨는데 공부하시기를 매우 힘쓰시고 드시는 것이 담박하여 다른 사람이 보기에 감당하지 못하실 것 같았으나 선생께서는 더욱 裕如하신 듯하셨다. 선생께서는 더욱 도의 소견이 친절하시고 나아가시는 바가 더욱 깊어져서 스스로 즐기시며 밖을 사모할 것을 잊으셨기에 비록 궁약한 가운데에 계셔도 然히<이연은 마음이 평안한 것이다> 自得하여 늙음이 이르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후에 학도들이 정사 서쪽에 집을 지어 거처하니 이름을 亦樂이라 하였는데 논어의 ‘벗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12월에 소명을 입으시니 그 때에 天使가 오게 되어서 宋純과 林億齡 등이 계청함에 인한 것이다.
1561년선생 61세
3월에 宣務郞이 정월에 소명이 내려 서울로 가려 하시다가 마침 낙마하여 병으로 사양하셨다. 이윽고 天使가 오지 않으므로 부르심을 그치셨다. 3월에 節友社를 쓰셨다. 이날 선생께서 溪上에서부터 도산으로 걸어나와 매화를 찾으실 때 시를 지어 이르시기를 . 6월에 成均館 典籍에 오르시고 中學敎授를 겸하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근친하시고 9월에 戶曺佐郞이 되셨다.

꽃은 바위가에 피었는데 봄은 고요하고
새는 시내 나무에서 우는데 물은 잔잔히 흐르는도다.
우연히 산 뒷길을 좇아 아이와 갓 쓴 사람을 데리고
한가하게 산 아래에 이르러 考槃을 보노라.

<고반은 毛詩에 있는 말이니 근거한 땅을 말하는 것이다> 李德弘이 묻기를 “이 시는 천지와 상하가 같이 흐르며 만물이 각각 그 곳을 얻은 묘함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러한 의사는 있으나 미루어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셨다.
4월 旣望에 濯纓潭에 가서 배를 타고 달을 보실 때에 형의 아들 ■와 손자 安道와 문인 이덕홍이 같이 갔다. 淸風明月 이 네 자로 운을 나누어 글을 지으시고 前, 後赤壁賦를 읊으시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셨다. 12월 陶山記를 지으셨다.
1562년선생 62세
3월 上巳에<첫 보름날이다.> 도산에 나오셔서 배를 타고 靑溪에 이르러 시내를 임하여 대를 쌓고 이름을 靑溪臺라 하셨다. 李龜巖이 와 뵙고 두어 날을 머물고 감에 선생께서 石磵臺에 가서 송별하셨다. 7월 旣望, 16에 風月潭에서 놀아 소동파의 옛 일을 잇고자 하여 아는 벗들과 언약하셨으나 큰 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두 절귀가 있다.<절귀는 小詩이다>
1563년선생 63세
3월에 黃錦溪의 부음이 오니 곡하셨다. 금계의 이름은 俊良이요 자는 仲擧니 글짓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늦게 다시 성리학에 뜻을 두어 자주 선생을 좇아 의심되는 것을 질정하며 가르침을 청하여 왕래하는 서적이 매우 많았는데 이 때에 星州牧使의 직책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죽음에 선생께서 매우 애석하게 여기시고 제문을 지어 두 번 사람을 보내어 제하시고 장사지낼 때에는 行狀을 지으셨다. 9월에 왕세자의 장사를 들으시고 도산에 나오셔서 設位하여 예를 행하시고 10월 초 4일에 복을 다하셔서 5일에 除服하셨다.
1564년선생 64세
윤 2월에 안동땅에 가서 고,증조묘에 제하시고 族會하셨다. 4월에 제생과 더불어 청량산에서 노셨다. 遊山하여 지으신 글이 있다. 9월에 靜菴 趙선생의 행장을 지으셨다. 心無體用辯을 지으셨다. 宗室에 鍾城令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별호는 蓮坊이었다. 일찍이 徐花潭을 좇더니 이 때에 이르러 심무체용서를 지어 金就礪를 통하여 선생께 질정함에 선생께서 변정하셨다. 대강 말씀하시기를 “寂과 感으로써 體用이라 하는 것은 주역에 근본하였고 動과 靜으로써 체용이라 하는 것은 맹자께 근본하였으니 다 마음의 체며 용이다.<戴記는 예기편명이다. 寂은 고요하고 나즈막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感은 일이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動은 感과 같고 靜은 寂과 같다. 성은 마음이 있으나 발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정은 성으로써 이미 발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는 마음의 본체요 용은 마음으로써 내어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한 마음이 六合에 가득하고<육합은 천지와 사방이다> 고금에 뻗쳤으며 幽明에 관통되어 있으며 만사에 투철한 것이나 그 중요한 것은 이 두 자에서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두 자는 체와 용이다> 체용이라 하는 일이 비록 先秦 때의 글에 보이지 않으나<선진은 진나라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程朱 이래로 모든 선비가 도를 의논하며 마음을 의논함에 이것으로써 주를 삼았으며 강론하고 辯析하여 오직 밝히지 못할까를 두려워 하셨고 陳北溪의 心說에서<진북계는 옛 선비요 심설은 마음에 옳은 글이다> 더욱 주장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사람의 마음에 체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제 蓮老가 말하기를<연노는 연방이다> ‘마음에는 진실로 체용이 있으나 근본을 더듬으면 체용은 없다.’ 하였는데 내가 들으니 정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하나일 뿐이나 체를 가리켜 말한 사람도 있고 용을 가리켜 말한 사람도 있다.’ 하셨으니 이제 이미 체용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마음이라고 한 즉 마음을 말하는 것이 남은 것이 없는데 또 어찌 별도로 체용이 없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마음 이전이 되겠는가? 또 말하기를 ‘동정은 實한 이요 체용은 虛를 말하는 것이니 도와 이는 본래 체용이 없으나 동정으로써 체용을 삼았다.’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도와 이에는 동도 있고 정도 있으므로 정 이 한 자를 가리켜 체라 하고 동 이 한 자를 가리켜 용이라 하니 그러한 즉 도리의 동과 정이 실한 것이요 도리의 체와 용도 실한 것이니 또한 어찌 별도로 한 도리가 체용이 없는 것이 근본이 되어 동정의 앞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체는 형상 위에서 생긴 것이고<상은 형상이다> 용은 또 동 위에서 생겨나는데 어찌 동 이전에 용이 있겠으며 어찌 상 이전에 체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邵子의 ‘본래 체가 없다.’ 하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체가 없은 즉 용이 없는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체용은 두 가지가 있으니 도리에 나아가 말하는 것은 沖漠無한 것이나 만상이 이제 막 생겨나려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요<충막무진은 혼합하여 징조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만상이 森然已具란 말은 일만 일이 일일히 다 갖추어졌다는 말이다> 사물에 나아가 말하는 것은 배가 물에서 가며 수레가 뭍에서 가니 배와 수레가 물과 뭍에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呂子約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형이상의 것으로 말한다면 충막한 것이 진실로 체가 되고 그 사물 사이에서 발한 것이 용이 되는데 만일 형이하의 것으로 말한다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그 이가 발하여 보이는 것이 용이 되니 하나로써 형이상의 것을 도의 체라 말하고 천하에 통용된 도가 다섯 도의 용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다섯 도는 부자, 군신, 부부, 형제, 벗이 사귀는 오륜도이다> 배와 수레의 형상으로써 체라 하고 물에서 가며 뭍에서 가는 것으로써 용이라고 한다면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고 동 이전에는 용이 없다고 말하여도 옳겠지만 만일 충막으로서 체라고 한다면 이 체는 형상 이전에 있지 않으며 만상이 이에 갖춘 것을 용이라고 한다면 이 용이 동 이전에 있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본다면 蓮老가 말한 체는 형상에서 생겨나고 용은 동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 다만 형이하의 사물의 체용을 말하여 아래에 있는 한 쪽으로 떨어져서 실로 형이상의 충막하여 근심이 없으며 체와 용이 한 근원인 묘한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오직 그 형상의 끝에 치우쳐져서 형상 이전의 체가 없다고 말하였고 소자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나 소자가 말한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형체가 없다고 말한 것이지 충막한 체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체를 알기를 원만하게 하지 못한 즉 용을 알기를 원만하게 하지 못한 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탄식하는 말씀이다> 충막하여 조심이 없는 것은 乾坤에 있어서 無極太極의 體가 되어 만상이 이미 갖춘 것이요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지극히 허하고 지극히 안정된 체가 되어 일만 가지 용이 다 갖추어진 것이요 그 사물에 있어서는 문득 발하여 보이고 흘러 행하는 용이 되어 때를 좇으며 장소를좇지 않는 데가 없는 까닭에 程선생께서 이미 체용이 한 근원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반드시 나타나며 微한 것이 간격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체용 이 두 자가 살아 죽은 것이 아니라면 원래가 모든 것을 포괄하여 묘한 것을 궁진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써 생각해보건대 어찌 한갖 체자가 형상 위에서 생겨나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다고 말하며 어찌 용자가 동 위에서 생겨나 동 이전에는 용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어찌 태극을 성인이 억지로 지으신 이름이라고 하여 체용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그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은 맹자께서 다만 마음이 周流하고 변화하여 神明不測한 묘를 얻으며 잃기 쉽고 안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바로 이 마음의 용이 사물 사이에서 발하여 보이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진실로 마음에 체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에 어디로부터 이 용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셨다.
1565년선생 65세
4월에 글을 올려 同知中樞府事 벼슬을 해직시켜 주시기를 청하시니 주상께서 좇으시고 전교하시기를 “내가 경을 기다리노라. 자리를 비운지 여러 해 되나 억지로 물러가 한가로이 있기를 구하니 이는 내가 어진 사람을 대접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그러한 것이다. 다만 경의 뜻이 깊고 간절하므로 勉從하노라.”하시고 얼마 후에는 本道에 명하여 食物을 주셨다. 은혜를 입어 물러감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여덟 절귀가 있다. 文定王后의 상사를 들으시고 곡하시고 성복하셨다. 敬齋箴圖와 白鹿洞規圖와 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위에 붙이셨다. 8월에 제생과 더불어 啓蒙을 강론하셨다. 景賢錄을 개정하셨다. 龜巖 李公이 기록한 것을 보면 “楨<귀암의 이름이다>이 일찍이 寒喧堂선생의 家範과 行狀과 議得 등 책을 얻어 편찬하여 한 책을 만들었으나 문견이 얕고 좁아 소루하기가 매우 심하였다. 이에 의심되는 것을 퇴계 선생께 취품하여 질정하니 선생께서 義興 金立과 秀才 鄭崑壽 등이 기록한 것을 아울러 취해 參訂하여 결정본을 만드셨다.” 하였으니 이것이 경현록을 개정한 始末인 까닭에 여기에 붙여 보인다. 12월에 特旨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민하기 때문에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어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늘 늙고 병든 것으로 사양하니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경이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 속히 올라오라” 하시고, 또 역마타는 것을 허락하시고 다시 중추부사가 되셨다.
1566년선생 66세
정월에 소명을 받으시고 서울로 가시다가 榮川에서 辭狀하시고 豊基에 가서 머물면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교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경의 사장을 보니 내 마음이 缺然하다. 사양하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와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하시고 또 沿路의 각 관에 명하여 호송하게 하고 內醫에게 약을 주어 문병하게 하셨다.
풍기에서 醴泉으로 가서 또 글을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셨다.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資憲大夫工曹判書 겸 藝文館 提學으로 임명하심에 또 사양하셨다. 선생께서는 승직되었다는 말을 듣고 예천으로부터 鶴駕山 廣興寺로 들어가 3월에 또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 번 무오(戊午, 1558)년에 조정에 들어가 성균관 장관이 되었으나 병이 이미 심하여 서너달 동안에 출근 날을 5. 6일 밖에 채우지 못하였는데도 도리어 명으로 승직시켜 본조참판이 되었으나 두어달 동안 겨우 사흘을 다녔고 한치 만큼의 남은 힘도 없어서 보답할 가망이 없으므로 어쩡정하게 물러나 돌아왔는데 이제 까닭없이 갑자기 승진되니 自古 以來로 언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살펴주시어 신의 해골이나 고향에 가서 묻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지난해 4월 20일의 일처럼 신을 同知指揮에서 직분없는 자리로 두어 주시면 조금이나마 신의 명을 이어 도리를 다하고 죽음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재촉하여 부르셨다. 선생께서 이미 사장을 올리고 관흥사에서 鳳停寺로 옳겨 또 글을 올려 아뢰기를 “새로 제수하신 벼슬은 도리나 자격과 이력으로 보나 받을 만한 이유가 없으며 留連하여 명을 기다린 것이 오히려 승직되기를 원하는 뜻이 있는 것 같아 신의 죄가 더욱 중합니다.” 하시고 봉정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셨다.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사 동지경연 춘추관사를 겸하게 하셨다. 4월에 갈려 지중추부사로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리시어 부르셨다. 사장이 미쳐 주상께 올라가기 전에 문형의 명을 또 내리셨다. 얼마 후에 주상께서 사장을 보시고 선생께서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 대신을 불러 의논하시니 대신들이 “六卿은 오래 비워둘 자리가 아니며 대제학은 나라의 글이 나오는 곳이므로 더욱 비울 수 없는 관직이니 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그 말을 따라 한직을 주라 하시니 지중추로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려 안심하고 조리하면서 병이 차도가 있으면 올라오라 하셨다. 7월에 글을 올려 자헌의 加資와 지중추의 직명을 사면하시고 전의 벼슬로 취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병의 차도가 있으면 올라오라고 명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간절히 기다렸는데도 여러 번 사양하고 가지 않으셨으나 주상의 뜻이 더욱 간절하시니 현인을 불렀으나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것으로 글제를 삼아 독서당 신하들에게 각각 글을 지어 올려라 하시고 또 선생이 계신 도산을 그리게 하시고는 礪城君 宋寅을 시켜 지으신 도산기와 雜詠을 그 위에 쓰게 하고 병풍을 만들어서 거처하는 곳에 펼쳐놓게 하셨다. 10월에 晦齋 이선생의 행장을 지으시고 그 문집을 교정하셨다. 心經後論을 지으셨다. 선생께서 心經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것을 더욱 지극히 하여 四子와 近思錄보다 못지 않다 하였는데 錦溪 黃俊良이 선생께 글을 올려 심경을 배척하여 말하기를 “眞西山은 빛만 있고 실하지 않고 范蘭溪는 지번하여 절당하지 않고 黃慈溪의 소견은 두 사람에 비하여 더욱 떨어지고 程篁墩은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선택한 것이 정하지 못합니다.” 하여 선생께 고쳐 刪定하시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회답에서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변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이 논설을 지으시니 “심학에 연원을 천명하였고 異端의 榛荊을 물리친 것이 깊고 간절하여 밝히시고<심학 연원은 심학의 근원이요 이단은 성인의 도가 어진 것이요 진형은 이단이 우리 선비가 정한 길이 가시같다는 말이다> 草廬와 篁墩 두 사람의 말을<초려와 황돈 두 사람은 대명 때의 사람이다> 자세히 그 잘못된 것을 분석하고 그 소장을 없애지 않아 바른 학문의 소맥이 환하게 밝혀져서 다른 갈림길에서 헤매지 않게 하셨으니 그 후세를 위하여 생각한 것이 지극한 것이다.” 하고 선생께서 또 중국의 학술이 틀려 白沙와 陽明의<다 禪學하였던 사람이다> 여러 학설이 세상에 성행하고 증자와 주자가 서로 전해 오던 도통이 날로 湮滅해 가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일찍이 계속 근심하여 깊이 탄식하고 이에 백사의 詩敎와 양명의 傳習錄 등의 책을 다 의논하여 분변하여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셨다. 柳仁仲에게 편지하셔서 續蒙求란 책을 의논하셨다.
1567년선생 67세
2월에 주상께서 다시 부르셨다. 嘉靖皇帝께서 崩御하시고 새 황제께서 즉위하시므로 天使가 오게 되었기에 대신 李浚慶 등이 아뢰어 문학하는 선비를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天使를 대접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召命이 또 내렸다. 주상께서 5월에 諭旨를 내려 올라오기를 재촉하시므로 6월에 서울로 올라가셨다. 明宗께서 승하하셨다. 선생께서 서울에 올라가신지 사흘만에 병으로 미처 肅拜를 드리지 못하고 계시다가 변을 들으시고 烏紗帽와 黑角帶를 하고 대궐에 나아가 곡을 하셨다. 7월에 大行王의 行狀 修撰廳의 堂上官이 되시어 행장을 지으셨다. 禮曹判書 兼 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받고 두 번을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는 듣지 않으셨다.
8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시고 즉시 東으로 돌아오셨다.

9월에 大行王의 挽詞를 지어 올리셨는데 五言排律 이십운(韻)의 서문에 말한 대략을 들면 “6월 25일에 臣이 서울에 들어와서 26일에야 비로소 주상께서 편안치 못함을 들었는데 27일에 大漸하여<병세가 위중하시다는 말이다> 28일에 宮車晏駕하시니 신은 서울 오는 길에 병이 심하여져서 미처 拜命치 못하고 갑자기 큰 변을 만나게 되어 우러러 통곡하니 오장의 끝이 헐리고 天使 맞을 준비로 분주하여 과로해서 몸이 상하고 천한 병이 매우 깊어 심한 데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春館의 명이 있어서<춘관은 禮曹이다> 하루도 소임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면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前朝에 병이 들어 물러간 신하로서 뒤를 이으신 왕께서 새로 정치를 시작하심에 은혜로운 명령을 저버리기를 이와같이 하니 신하로서의 의리가 땅에 떨어진 것 같은지라. 만일 다시 因循하여 가지 않고 소임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며 녹을 먹다 죽으면<소임은 수행하지 못하면서 벼슬만 尸童같이 지낸다는 말이다> 수십 년을 괴롭게 사양하여 물러나기를 빌던 의리가 어디에 있으며 致仕와 해골의 보존을 청하는 것을 다 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벼슬이 바뀌는 틈을 타 몸을 빼서 돌아오니 이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며 또 이미 하였던 일입니다. 신이 서울에 있을 때 들으니 군신으로 하여금 각각 挽詞를 지어올리라고 하신다 함에 신이 병든 탓으로 소견이 아득하고 어두워져서 짓지 못할 것 같았으나 죽지 못한 날들의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겨우 한편의 挽詞를 지어 사람에게 부쳐 서울로 올려보내 죄스러움을 무릅쓰고 都監에 바쳤습니다만 신이 山陵을 마치지도 아니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많은 지탄을 받는 중에 있으니 받아 줄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시고, 그 시에

벼슬을 명하시면 벼슬에서 지켜야 할 것을 잃었고
녹(祿)을 말하면 녹이 오히려 과하다.
옛 의리는 마땅히 빨리 가는 것 같고
지금의 정은 깊히 꾸짖음이 있구나.
의리와 정은 같이 있기 어려우니
지금과 예전의 다름을 어찌알까
하는 글귀가 있다. 18일에 龍壽寺에 계셨다. 19일이 大行王의 發靷날이므로 집에 계시기가 편치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1568년선생 68세
奇明彦의 편지에 회답하셨다. 선생이 물러나 돌아오신 것이 山陵의 일을 마치기 이전이라 하여 이 때의 여론이 분분하였기에 奇明彦이 편지를 보내어 물으므로 선생께서 회답하셨다는데 대략 말씀하시기를 “因山이 참담하고 欽衛가 임하여 있으니<欽衛는 나라 상여가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백 관원들이 따라가며 붙잡고 애통해 하는데 병든 신하는 길이 없어 예절에 와서 의지하고 있다가 마침 편지가 와서 옛 의리로써 책망을 하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의 사람됨이 또한 이상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의 처신함이 또한 어렵게 되었으니 어찌된 까닭이겠습니까? 크게 어리석고 심한 병이 든 탓이며 헛된 명성 때문이며 잘못 입은 은혜 때문입니다. 크게 어리석으면서 거짓된 명성을 받아들이고자 한 즉 망령된 짓이 될 것이고 심한 병이 들어서 잘못된 은혜를 입고 자 한 즉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령된 짓을 행하면 덕과 의리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吉하지 못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害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벼슬을 즐겨하지 않으며 떳떳이 몸이 물러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어서 이겠습니까? 옛날의 군자는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분명히 알아 한 가지 일도 지나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벼슬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즉 비록 크게 참지 못할 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 때문에 물러나기를 버리지 않은 것은 어찌 몸을 바치는 마당에 의리를 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몸이 물러난 후에야 그 의리를 좇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를 당하여 비록 크게 참지 못할 정이 있으나 의리에 굽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부득이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道가 같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고 도가 같지 않은 사람은 일천 말을 하여도 알지 못하니 제 몸이 堂 위에 있어야 바야흐로 堂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의 뜻이 어느 것이 옳으며 어느 것이 그르며 어느 것을 취하며 어느 것을 버릴 것인지를 말입니다. 수고롭겠지만 가르쳐 주시길 아끼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하셨다.

10월에 龍衛大護軍 兼 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 받으셔서 부르심을 받으셨다. 諭旨에 이르시기를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럽혀지는 것은 임금의 덕에 달려있고 임금의 덕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진 사람을 존경하며 학문을 강구하는데 있으므로 經筵에 부지런히 나아가 날마다 어진 선비와 서로 만나 마음과 지혜를 높고 밝게한 후에야 그 사람됨이 어질며 사특한지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經筵에 모실 만한 사람이 멀리 있으면 마땅히 그로 하여금 가까이 오게 하여 經筵의 所任을 맡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이 내려갈 때에 마침 과인이 皇皇罔極한 가운데 있어서 미처 살피지 못하였으나 이제 새롭게 정사를 보려함에 沈滯하였던 사람들을 모두 발탁하여 쓰고자 하는데 하물며 어진 재상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은 역마를 타고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 하셨다. 大司諫 睦詹이 아뢰기를 “李滉은 학문에 있어 해박하고 공부를 돈독히 하니 마땅히 敎旨를 내려 불러서 經筵에 두시면 반드시 聖學을 펴는 것을 돕고 인도하는 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召命을 내리셨다. 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으셨고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辭狀을 올려 召命을 거두시고 講職을 갈아주시고<講職은 經筵에서 강의하는 벼슬이다> 禮法에 의하여 致仕하게하여 주시기를 청하셨다.

知中樞府事로 직무를 바꾸시고 겸직은 예전대로 하시고 또 敎書로써 특별히 부르셨다. 許曄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帝王이 어진 스승을 얻어서 배운 후에야 事業이 높이 돋아나니 李滉이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만일 주상께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禮를 다해 스승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오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주상께서 말을 좇아서 선생과 曺植과 李恒을 똑같이 敎書로써 특별히 부르셨는데 이윽고 날씨가 추워 올라오지 못할까하여 “더디고 빠름에 구애받지 말고 따뜻할 때를 기다려 평안히 올라오라.” 하셨다. 12월에 교지를 내려 빨리 올라올 것을 재촉하셨는데 天使가 장차 오게 될 것이므로 應接할 일이 급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월에 상소하여 自劾하시고<自劾은 스스로를 탄핵한다는 말이다> 다시 致仕할 것을 빌으시고 召命을 사양하시는 辭狀을 올리셨다. 疏에 대략 말씀하시기를 “신이 듣자오니 聖帝明王 중에서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선비를 등용하는 것에 힘쓰지 아니한 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어진 선비로서 반드시 모두 바른 사람을 얻어서 진실로 그 실지를 취하였던 것이니, 만일 한갖 어진 사람을 좋게 여기는 뜻과 어진 일을 즐겨하는 정성은 갖고 있으나 사람 알기가 어려운 줄을 생각하지 않으며 사람의 그릇이 어떠한지도 묻지 않고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사람을 잘못 불러서 받아들이기를 부지런히 할 뿐만 아니라, 거짓 이름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선비를 갑자기 어진 사람으로 존경하고 예를 받게 하시면 이는 굽은 것을 들어서 곧은 것을 버리는 것과 같아서 많은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섞이어 나라의 政事가 날로 흐트러질 것입니다. 신이 先朝 때에 여러 번 선왕께서 내리신 召命을 받았었는데 그 중 앞서 세 번 부르실 때에는 다만 벼슬의 品階가 낮아 별달리 嫌疑될 것이 없었기에 신이 명을 받고 즉시 행함에 일찍이 의심하고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그 후의 두 번 부르실 적에는 한 번은 장차 벼슬의 品階를 올려서 중한 책임을 맡기시려 하시며 또 한 번은 이미 品階를 올려서 중한 소임을 주시므로 신이 區區하고 위태롭다는 생각에 극력히 사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 서울로 들어가서 망극한 변<국상>을 만나고 천한 병이 갑자기 더욱 심하여져서 능히 소임을 행하지 못하고 義理를 이미 펴지 못하였기 때문에 홀로 몸이 물러나는 것만이 의리에 的然하고 매우 분명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山陵이 바로 있었으나<山陵은 國葬이다> 능히 머물러 기다리지 못하고 경솔히 질러 돌아오니 이것은 또한 理가 극에 달하고 의리가 변한 것으로 부득이 나온 것인데 한 때의 物情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거짓 병이다.’고 말하고 혹은 산짐승에게 비유하기도 하고 혹은 指斥하여 이단이라고 하니 이것은 신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그 때의 어진 사람들에게서 큰 죄를 얻은 것인데 다시 무슨 도리로써 주상께서 권고하시는 뜻을 받들어 이 시대의 쓰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虞人이 이르지 않은 죄를 너그러이 보아주시며 先王의 사람 물리친 禮를 詳考하셔서 잘못 내리신 有旨를 도로 거두시고 이것으로 인해 召命을 파하시고 致仕하는 법전을 다시 거행하여 신의 목숨을 들어 비는 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셨다.<虞人은 산을 지키는 천한 소임을 맡은 이로 齊나라 경공이 사냥하려 할 때 虞人을 부름을 대부(大夫)의 禮로써 하거늘 虞人이 감당하지 못하여 가지 아니하였는데 孔子께서 옳다고 하셨다. ‘先王은 옛 어진 임금으로 옛 어진 사람 부름을 禮로써 하였다.’는 말이 있다>  崇政大夫로 승진시 議政府右贊成으로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셨다. 선생의 상소가 미처 주상께 올라가지 못하였는데 주상께서 또 대신들에게 이르시기를 “李滉을 軍職에 있게 하는 것은 尊賢하는 도리에 족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가히 특별히 贊成을 제수하고 다시 일러서 올라오게 하라.” 하시며 이러한 벼슬을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야 상소가 주상께 들어가니 주상께서 친히 批答하여 말씀하시기를 “卿의 상소에 담긴 글을 보니 謙謹하여 사양하는 것이 지나치도다. 卿이 累朝의 옛 신할 德과 행실이 높고 학문이 바른 것을 비록 閭巷사람이라 한들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나 또한 그대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노라. 卿이 先朝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고 서울로 들어왔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또한 都下에 이르렀으나 불의의 망극한 변을 만나 갑자기 도로 돌아가니 이는 반드시 新政이 도리를 잊고 尊賢하는 것을 정성으로 하지 않은 연고이라. 나의 뉘우치고 한스러워함을 가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人君은 비록 밝고 어질어도 반드시 어진 사람을 구하여 스승으로 삼았거늘 하물며 나는 어려서부터 엄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서 갑자기 어렵고 큰 덕을 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慈殿께서도 역시 말씀하시되 ‘내가 지식이 없고 더구나 망극한 가운데에 있으니 내가 어찌 주상을 가르쳐 인도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李滉 같은 이가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시며 항상 卿이 올라오기를 바라시니 慈殿의 뜻이 이렇듯이 간절하신데에도 卿이 즐겨 올라오지 않는 것은 卿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지금에 이르러 조정에 비록 나이가 많고 德이 있는 사람이 많으나 내가 卿을 바라는 것을 또한 북두성과 같이 하니 卿은 모름지기 進退로써 嫌疑를 삼지 말고 올라와 병을 降仍하고 조정에 머물러서 나의 憂末한 기질을 도우라.” 하셨다. 3월에 또 상소하여 새로 올리신 벼슬을 사양하시고 “전의 벼슬로 致仕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비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시 敎書를 내려 올라오라 재촉하시거늘 또 사양하셨다.

疏에 대략 말씀하시기를 “臣이 지난 해 10월부터 금년 2월 그믐에 이르는 동안 무릇 7번이나 聖旨를 받았으니 모두 불러 벼슬을 제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臣은 극히 無狀하여 족히 주상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을 막으며 밝은 뜻에 부응하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늘 한 번 명을 내리실 때마다 곧 붉은 정성을 드러내어 엎드려 疏를 올려 벼슬을 갈아 주시기를 빌었으나 정성이 주상께 통하지 않아 허락하시는 말씀을 오히려 내려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천하에 있는 인재의 品은 큰 것도 있으며 작은 것도 있으니 큰 것을 가히 작은 것으로 삼지 못하며 작은 것을 가히 큰 것으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先王께서는 그것이 그러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벼슬주기를 각각 그 才品에 따라 큰 재주를 가진 이에게는 큰 소임을 주시며 작은 재주를 가진 이에게는 작은 소임을 주어 일찍이 분에 넘쳐 지나치게 주지 않으시니 어찌 人君이 사람 쓰는 것에만 이러했겠습니까? 신하로서 나아가 세상에 쓰이는 자는 그 능하며 능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헤아려 보지도 않고 나아간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헤아린 후에 들어가고 들어간 후에 헤아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臣이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한 자질로써 여러 해 동안 沈痼한 병이 들어서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 힘껏 일해 먹고 살며 본래 타고난 본분을 지켜 예전에 논란이 되던 죄를 면하고자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거짓 이름을 더 얻게 되어 先朝께서 잘못된 은혜를 더 자주 내리시게 된 것은 뜻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臣은 이에 바야흐로 본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쉬고자 하였거늘 조정에서는 그 사양하는 것으로 인해 발탁하여 품계를 올려주셨고 신은 또 승진된 것을 힘써 사양하거늘 조정에서는 올리신 것을 또 올리시니 공로로써 말하면 한 가닥의 털끝 만큼도 나타난 것이 없는데 벼슬로 말한다면 높다랗게 六卿의 줄에 있는지라 이는 古今天下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신의 큰 허물이 되는 것이니 굽어보며 우러러보니 부끄럽고 두려워 어떻게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제 九五의 용이 날고 만물이 모두 우러러 보는지라 어진 사람을 좋게 여기시며 어진 일을 즐겨하시는 것이 至誠에서 나오셨거늘 所見固滯한 신하가 있어 외람되게 臣의 이름을 들어 과장되게 表裝하고 의논하여 천거하여서 자리가 평안치 못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시는 아름다운 뜻을 잘못되게 하고 신을 부르시는 것이며 다만 신에게 명하신 것이 거듭되어 성하며 무거우니 모두 臣이 받들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臣은 바야흐로 또 疏를 펴서 스스로 죄를 청하여 벼슬을 갈아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워하였는데 그 疏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동안에 또 특별히 贊成으로 벼슬을 올려주시는 명이 계시니 신이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기를 원했던 뜻에 비해 보면 그 가볍고 중한 것과 크며 작은 것과 능히 감당하며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억지로라도 軫念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덕의 소리를 渙發하여 전에 冒諂하여 받은 벼슬을 비록 모두 갈아주시기를 바라지는 못하나 이번에 새로 주신 높은 品階와 벼슬과 經筵官을 兼帶하게 하신 것을 빨리 도로 명하여 거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敎書를 내려 간절히 타이르시고 또 各道의 監司에게 명을 내려 ”수로와 육로에서 가마나 말과 배로써 호송하라.“ 하시거늘 선생께서 또 글을 올려 높은 品階를 힘써 사양하셨다. 그 때에 天使가 돌아간 후에 모든 신하들에게 비단과 향을 나누어 주셨는데 이에 선생께서도 참여하시게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아뢰시기를 “이것은 조정이 皇恩을 공경하여 받들어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같이 하실 일로서 臣은 贊成의 벼슬을 명하신 것을 받들지 못하였는데도 그 벼슬을 일컬어 물건을 내려주시니 진실로 祉受하기 어려우며 또 몸이 멀리 서울 밖에 있어 天使가 돌아갈 때까지 한 가지도 해드린 일이 없는데도 모든 신하들과 똑같이 물건을 내려주시는 것은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시고 모두 사양하여 받지 않으셨다. 

5월에 贊成을 갈고 判中樞府事로 부르셨다. 선생께서 힘써 새 명을 사양하시니 조정에서는 억지로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經筵에서 知中樞府事를 내려 주셨는데 또 지성으로 부르시면 마땅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청하는 이가 있어 이에 贊成을 갈아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내 조그마한 몸으로 민간에서 나고 자라 들어와서 大統을 받들어 臨御하였기 때문에 즉위한 이래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어진 덕이 있는 선비를 모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 일을 보충할까 생각하였다. 卿은 본래 성품이 澹하고 마음 두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純一하고 밝아 한가한 곳에 있어 安靜함을 지켜서 선비의 학문에 潛心하니 또한 진심을 쌓고 힘쓴 것이 오래라. 그 의리와 性命이 깊은 것과<性命은 사람이 타고난 성이고 命은 하늘이 주신 명이다> 理를 궁구아여 지극함에 다다르며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점을 반드시 脫然히 알고 깨달아 洞然히 나아가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經筵의 위에 두고 그 의리와 법도를 보며 의견을 들으면 족히 나의 어리석으며 어두운 것을 없게 하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므로 여러 번 부름을 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는데도 끝내 일어나 나올 뜻이 없으니 내가 심히 缺然하다. 지난 번에 卿에게 右贊成의 벼슬을 준 것은 내가 卿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卿에게 바라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오. 모든 의견의 공정함을 좇아한 것이거늘 卿은 도리어 이 일로써 嫌疑로 여겨 물러가 사양하기에 더욱 힘쓰니 내가 경을 褒하려는 것이 다만 족히 卿을 막는 것이 되었구나. 이미 명하여 갈았으니 경이 다시 무엇을 嫌疑로 여길 것이 있는가. 예전에 先王께서는 卿을 寵眷하여 남달리 높게 대접을 하신 것이 가히 지극하다 할 수 있었다. 諸葛武候께서 말씀하시기를 ‘先帝께서 남다른 대접을 하신 것을 좇아 폐하께 갚고자 합니다.’ 하셨으니 卿이 진실로 先王을 잊고 나를 버리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니 卿은 이것을 생각하여 가히 평안하게 있으면서 더디게 오지는 말라.” 하셨다.

6월에 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셨는데 가시는 길에 연이어 글을 올려 높은 職品을 사양하고 모두 갈아주시기를 빌었으나 주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벼슬이 갈렸다는 명을 받으시고 즉시 글을 올려 謝禮하여 말씀하시기를 “미천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특명으로 贊成 벼슬을 갈아주셨으니 聖眷이 이에 이르셨는데 어찌 갚을 것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臣이 마땅히 병으로 부축받아 나아가더라도 恩命을 謝禮해야 할 것이나 다만 一品의 외람된 品階는 끝까지 그대로 받을 이유가 없으니 바라옵건대 벼슬을 모두 갈아주시는 큰 은혜를 베푸소서.” 하시고 聞慶에 가셔서 다시 글을 올려 사양하시고 忠州에 가셔서 또 글을 올려 힘써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는 모두 허락하지 않으시고 辭狀 중에 길에서 병이 났다는 말이 있다 하여 內醫를 보내어 달려가서 돌보라고 하셨다.

7월 병인(丙寅, 19)일에 서울로 들어가시니 도성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되 李貳相께서 오셨다고 하였다. 신미(辛未, 24)일에 대궐로 나아가 肅拜를 드리고 召命을 받고도 오는 것을 더디 하였으므로 待罪하셨는데 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 待罪하지 말라. 이제 내가 卿을 얻으니 이는 실로 나라의 복이로다.” 하셨다. 또 선생께서 높은 品階를 개정하여 주시기를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임신(壬申, 25)일에 思政殿에 들어가 뵙고 친히 진술하여 힘써 사양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8월에 弘文館副提學을 겸하게 하시거늘 사양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옛 전례에 知經筵은 朝講에만 들어갔는데 正言 吳健이 아뢰기를 “李滉이 올라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循例로 접견하지 마시고 晝講과 夕講에도 명하여 불러 강론하시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 말을 좇으시므로 선생께서 “그것은 법규 밖의 일이니 감히 평안하게 행할 것이 아닙니다.” 하시고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 위로하고 타이르시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계미(癸未, 6)일에 弘文館 大提學과 藝文館 大提學과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셨다.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진수하시니 “첫째는 이른바 계통을 중하게 여겨 仁孝를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왕실의 至親으로 들어와 大統을 이으셨으니 무릇 뜻을 이으시고 사업을 이어 닦으시는 바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仁孝하시는 도리에 지극하심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지는 않으나 마음은 소반의 물을 받드는 것보다 어렵고 어진 일은 바람 앞의 촛불을 安保하는 것보다 어려우니 다른 때에 귀와 눈을 속여 가리는 것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며 사랑하며 미워하는 것과 남을 요괴같이 현혹하는 것이 함께 생겨나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 일이 익혀지며 情이 尋常하여서 宗廟를 받들며 長樂을 받드는 것이 동요되고 어그러지며 풀어짐이 있어 마땅히 용서하게 할 것은 降殺하게하여 마땅히 降殺하게 할 것은 융성하게 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예로부터 들어와서 大統을 이으신 임금이 敎에 대한 죄를 지은 경우가 많은 까닭이니 오늘날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바입니다.<長樂은 궁이름이니 계신 곳이라. 敎는 성인이 예로부터 하상 가르치시던 人倫을 말하는 것이고 마땅히 융성하게 할 것은 이으신 바를 말한 것이고 마땅히 降殺할 것은 私家의 어버이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讒間을 막아서 兩宮을 친하게 하는 것입니다.<讒間은 참소하여 이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兩宮은 대전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효도하는 사랑하는 도리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그 倫紀가 지극히 중하고 그 정이 매우 간절하니 마땅히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나 혹 효도하는 데에 빠진 것이 있으며 사랑하는 하늘이 또한 虧損하는 것이 있음에 이르기를 보통 사람도 진실로 이런 죄를 면하지 못함이 있는데 帝王의 집에 이러한 근심이 더욱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좌우 가까이에서 주상을 모시는 자와 內戰에서 부리는 자는 宦官宮妾들인데 이 무리들의 성품은 陰邪하고 교활하여 간사한 것을 끼며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며 분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재앙 만들기를 즐겨 패를 나누어 많은 것은 다투며 적은 것은 헤아림에 그 情狀이 일만 가집니다. 그러므로 혹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여 믿으면 자연히 불효에 빠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음에 빠질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 전하의 대비 섬기심에 이른바 의리로써 은혜를 두텁게 하고 변칙으로써 常道에 처하실 것이니<이는 친 자제가 아닌 것으로 繼后하셨으니 상도의 친 모자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는 실로 소인과 여자들이 틈을 엿보고 端을 조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궐내에는 늙고 간사한 무리와 늙고 蠱惑하는 무리가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周易에 있는 집안의 사람 대접하는 의리를 보시며 小學에 있는 人倫을 밝히는 가르침을 法으로 삼아 몸 다스리기를 엄하게 하시고 집을 바르게 하는 데에 삼가며 어버이 섬기기를 두텁게 하시고 자식의 職任을 극진하게 하셔서 左右近習의 사람으로 하여금 兩宮에 지극한 정으로 효도하고 사랑하시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게 하여 우리를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이 그 사이에서 행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면 자연히 陰邪한 무리들이 이간하여 분란을 일으킬 걱정이 없어 효도함에 闕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마음을 미루어 효도와 공경을 恭懿殿에 이르게 하시면 도리가 이어지며 이어지는 것이 높아져서 仁이 지극하고 의리가 극진하여 三宮의 즐거우심이 지극하게 되고 일만 가지 복이 다 이를 것입니다.<慈殿은 明宗王后이시고 恭懿殿은 仁宗王后이시니 三宮은 慈殿과 恭懿殿과 大殿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임금으로서 배우는 것을 돈독히 하여 그것으로써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제왕의 학문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의 요점으로 大舜이 禹께 명하신 것에 근원하고 있는데 그 말씀에 이르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道心은 미묘하니 精하고 한결같아야만 진실로 그 中을 잡을 것이라,’하였습니다.<인심은 七情이니 눈으로는 좋은 빛을 보고자 하고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고 입으로는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고 코로는 좋은 냄새를 맡고자 하고 四肢는 평안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살피지 않으면 잘못된 일을 하기 쉬우므로 위태롭다 하는 것이고 道心은 四端이니 어진 마음이지만 처음 시작하여 나올 때에 그 끝이 미묘하여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시니 精이란 말은 그 사이를 바르게 살펴 함부로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요 一이란 말은 꼭 지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舜의 이 말씀에서는 다만 위태롭고 미묘하다는 것만 말씀하시고 그 위태롭고 미묘한 까닭은 말하지 않으셨으며 다만 精하며 한결같은 것으로 가르치시고 精하며 한결같이 하는 방법은 보여주지 않으시니 후세의 사람들이 이에 의거하여 도리를 진실로 알아서 실지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모든 성인이 서로 이어 孔子께 이르러서 그 법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大學의 格致誠正과 中庸의 明善誠身이 그것입니다.<格致는 이치를 窮究하는 것이요 誠은 뜻을 實하게 하는 것이요 正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明善은 어진 일을 밝게 알림이요 誠身은 몸을 닦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臣이 청하옵건대 먼저 말한 첫번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性과 情과 얼굴과 안색과 날마다 쓰는 人倫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하늘과 만물과 古今事變의 많은 것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실질적인 이치와 지극히 마땅한 법칙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연의 스스로 있는 中입니다.<中은 어느 한 쪽도 아니며 넘치는 것도 아니며 미치지 못한 것도 아니며 끌어 올린 것도 아닌 지극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배우기를 가히 넓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에 대해 묻기를 가히 자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을 생각하기를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을 분별하기를 가히 밝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 네 가지는 아뢰는 條目이며 이 네 가지 중에서 삼가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시작의 여러 끝을 發하셨으니 臣이 청하옵건대 그 쌓으신 功을 더 쌓아 세월이 오래되면 공부와 힘이 깊어져서 하루 아침에 훤하게 통하여 트이는 것이 있으면 비로소 이른바 體와 用이 한 근원이 되며 나타난 것과 미세한 것의 간격이 없는 것이 진실로 그러하여 위태로운 인심과 미묘한 道心이 아득하지 않고 精하게 살피며 반드시 지키는 것이 어지럽지 않아 中을 가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이른바 진실로 아는 것이라 합니다. 臣이 청하옵건대 다시 행하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뜻을 성실하게 함에 반드시 그 기미를 살펴 한 털끝 만큼도 實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함에 반드시 마음의 動과 靜을 살펴 한 가지 일도 바르지 않게 하는 것이 없으며 몸을 닦음에 한 가지의 편벽됨에 빠지지 말며 집을 가지런히 함에 어느 한 쪽만을 가까이하지 말며 보지 못하는 바를 경계하며 듣지 못하는 바를 두려워하며 혼자 있어 남이 모르는 곳에서도 삼가며 뜻을 굳게 하여 그치지 아니함은 힘써 행하는 條目이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때에 따라 그리고 곳에 따라 생각마다 거두어 잡으시고 일마다 두려워하여 조심하셔서 일만 가지의 더러움과 모든 욕심을 마음 가운데에서 씻어 버리시며 다섯 가지 떳떳한 倫紀와 일백 가지 행실을 지극한 善으로 磨하여 밥 먹으며 숨쉴 사이에도 계속하시며 의리를 헤아리셔서 분함을 징계하시며 욕심을 막으시며 어진 곳으로 옮기시며 허물을 고치시고 성실하며 한결같이 하시고 넓으며 크며 높으며 밝기를 힘써 예법에 벗어나지 아니하며 하늘을 도와 천하를 經綸하는 것이 다 玉漏에 根源하게 하십시오.<經綸은 실제 하는 이름인데 나라 다스리기에 비유하였고 屋漏는 집의 어두운 구석이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조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로 쌓은 것이 많으며 시간이 오래되면 자연히 의가 精해지고 仁이 익어 그만두고자 하여도 능히 그만두지 못하여 갑자기 스스로 성현의 中和된 곳에 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는 道術을 밝혀서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唐虞와 三代의 융성할 때에는 道術이 크게 밝아 다른 데에서 갈리어 미혹된 것이 없는 까닭에 사람의 마음이 바르게 되고 다스리는 덕의 교화가 흡족해지기 쉬웠으나 周나라가 쇠퇴한 후로부터는 道術이 밝지 않아서 邪慝한 것이 같이 생기므로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 다스리려고 하여도 다스려지지 않고 교화시키려 하여도 교화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일러 道術이라 하는가 하면 하늘이 명하신 것을 나서 떳떳한 人倫에서 행하는 것이니 천하와 고금에 다 같은 것으로 말미암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臣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道術을 밝혀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新政에 공헌하는 것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 밝히는 일은 또한 本과 末이 있으며<本은 처음이고 末은 끝이다> 먼저 하며 후에 하며 緩하며 急한 베품이 있는 것이니 人君께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으신 다음에 근본하여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것은 本이고 法制의 자취를 따르며 문물의 아름다운 것을 이어 依倣하여서 한 곳에 대어 생각하는 것은 末이니 本은 먼저 하고 急하게 할 것이고 末은 후에 하고 緩하게 하는 것입니다. 臣이 엎드려 보건대 동방에서 異端의 害로서는 불교가 가장 심하고 老莊의<노자와 장자다>虛誕한 것을 혹시 숭상하는 이가 있어 성인을 업신여기며 예법을 경멸하는 풍속이 간혹 있으며 管商의<管仲의 商이다> 術業을 다행히 전하여 진술하는 이는 없으나 功을 세며 利를 꾀하는 폐습이 고질화 되어있고 鄕愿의 덕을 어지럽히는 습성은 세상에 아첨하는 것의 濫觴이 되었으며 俗學의 향방의 아득한 근심은 擧子가 이름을 쫓는 데서 原한데<老子와 莊子는 허무한 것을 숭상하던 사람이고 管仲과 商은 완전히 利만 탐하고 형벌을 각박하게 하던 사람이고 鄕愿은 세족에게 아첨하여 밖으로는 용하다 하되 안으로는 실로 용하지 않는 것이고 俗學은 성인의 학은 아니라고 글을 외우고 글씨만 숭상한다는 말이다>하물며 이름내는 길과 벼슬 찾는 곳에 기회를 타서 막고 부정하여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가 또 어찌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로써 보건대 지금 인심의 不正함이 심합니다. 설사 불행히 주상께서 도로 향하신 마음이 조금이라도 처음과 같지 못하시면 무릇 이러한 여러 가지 사람들이 반드시 잡다하게 같이 나아가 달려들어 일백가지 방법으로 주상의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니 한 번만이라도 친하게 되면 곧 더불어 한 가지가 될 것이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뜻을 잡으시기를 金石같이 하여 처음과 나중에 변하지 마시고 道를 밝힘을 日月같이 하셔서 陰慝한 기운을 훤하게 없애 干犯침 못하게 하면서 떳떳이 오래되고 그치지 않으시면 기다려 興起하는 선비와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백성들은 다 큰 德에 올라서고 아래의 모든 간사한 것과 잡되고 陰慝한 것들은 또한 장차 신성한 敎化에 변화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길러온 腹心을 밀어서 耳目을 통하는 것입니다. 人主는 한나라의 元首이며 大臣은 腹心이며 臺諫은 耳目입니다. 서로 맞추어 삼자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옛날에 人君이 大臣을 신임하지 아니하며 臺諫의 말을 듣고 쓰지 않는 자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스스로 그 가슴과 배를 미워하여 버리며 스스로 그 귀와 눈을 발라 막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머리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혹시 大臣을 신임하여도 옳은 道로 말미암지 않아 대신을 구하는 것에도 그 나라를 바르게 하며 사업을 이루어 임금을 돕는 어진 사람은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첨하여 임금의 뜻에 따르는 자를 구하여서 그 사사로운 욕심을 이루기를 꾀하면 얻은 바 그 사람됨이 간사하여 政事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흉악한 도적으로 권력을 擅恣하는 자일 것입니다. 임금이 이런 사람을 욕심을 이루는 腹心으로 삼고 신하는 임금을 욕심을 이루는 머리로 삼아 위와 아래가 서로 합하여 굳게 맺어 사람들이 이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는 다 내쫓겨 나라 안이 비고 귀와 눈을 맡은 마을 관원은 모두 권력을 잡은 신하의 사사로운 사람이 되는 즉 이른바 귀와 눈이 元首의 귀와 눈이 아니고 權臣의 귀와 눈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귀와 눈을 빙자하여 勢焰의 불을 붙여 權臣의 惡을 당으로써 조장하고 腹心으로 말미암아 惡을 쌓으며 禍를 만들어 어두운 임금의 邪慝함을 쌓아 이루어 방자해서 스스로 각자가 하고자한 것을 얻었도다 하며 元首의 毒은 腹心에서 생겨나고 腹心의 蛇蝎은 귀와 눈에 의해 생겨나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皐陶의 노래에 말하기를 ‘元首가 叢하시며 股肱이 게으르면 일만 가지 일이 떨어지니라.’ 하니 이는 일만 가지 일이 떨어지는 책임이 元首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宋나라 신하 王介之가 말하기를 ‘재상이 宮禁의 의향을 받들며 急死가 재상의 공지를 받들면 조정의 기강이 땅을 쓸어버린 것 같다.’하니 사특한 길로 말미암지 않으면서 능히 서로 쓰임이 되는 것이 지극히 어진 道라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몸을 닦고 살피는 것을 정성으로 하여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보배를 잡으시고 왕위에 오르신 지 한 돌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별이 자주 변하고 시절 妖孼이 번갈아 일어나고 和한 기운이 응하지 아니하여 兩麥이 다 耗損되고 수재가 참혹함은 예전에는 없던 바이고 바람과 우박과 蝗蟲등 여러 재변이 보이니 이는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심이 깊이 위엄으로 경계하심이 지극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버이를 섬기시는 마음을 미루어 하늘을 섬기시는 도리를 다하시고 닦고 살피지 아니하는 일이 없게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때가 없어서 주상의 몸가짐에 비록 과실은 있지 않으나 心術의 隱微한 가운데에 쌓인 병을 가히 완전히 없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宮禁에는 비록 본래의 家法이 있으나 眷黨과 幽陰한 무리들이 청탁드리는 것을 가히 防遮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간하는 것을 들으시는 것은 비록 아름다운 것이나 때때로 사사로운 마음으로 굳게 거절하시는 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며 어진 일을 즐기심이 비록 호색하는 정성같이 하시나 혹 헛된 것으로써 억지로 구함에 이르신 것은 마땅히 살피실 것이며 벼슬과 상을 함부로 주지 말아 공이 없는 자가 요행으로 얻고 공이 있는 자는 몸을 풀어 흩어져 버리게 하지 마시고 赦하고 풀어주는 것을 자주 하지 마셔서 악을 행하는 자로 하여금 면함을 얻게 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해를 입게 하지 마시고 節義를 숭상하시며 염치를 가다듬어 名敎를 막아 지키기를 튼튼하게 하는 것을 가히 허술하게 생각지 말며 검약을 숭상하고 사치를 금하여 公私의 재물과 힘을 有餘하게 하는 것을 늦추지 못할 것입니다. 조종의 예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긴 것을 비록 조금이라도 變通하지 않을 수 없으나 혹 그 어진 법과 아름다운 뜻까지 일체 어지러이 고치면 반드시 큰 근심에 이를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바른 것을 미워하고 다른 것을 꺼려하여 틈을 엿보아 일을 일으키는 자를 미리 진정시키지 않을 수 없으나 혹 스스로 어진 무리들끼리 반목하고 서로 배척하여 공격하면 반드시 도리어 손상됨을 볼 것입니다. 옛 것을 지켜 보통 것을 좇는 신하를 오로지 쓰심은 지극한 다스림을 얻어내기에는 방해가 되며 새로 나아가 일을 일으키기를 좋게 여기는 사람을 편벽되게 부리시면 또한 어지러운 길을 돋우어내기에 이를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아전이나 종들은 바치고 심부름하는 자들을 이리떼처럼 잡아 먹으면서도 그래도 부족하여 마을 창고를 비울 정도로 도적질하며 鎭浦의 장수들은 군사를 호랑이처럼 삼키면서도 오히려 싫어하지아니하여 그 독이 善隣과 일족에까지 미치며 饑荒이 날로 심해지는데에도 賑救할 묘책이 없으니 모든 도적이 크게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변방이 허술하여 남쪽이나 북쪽에 틈이 있어 썩고 더러운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해올까 염려되는데, 무릇 이같은 무리를 臣이 감히 낱낱이 들지 못하니 오직 전하께서 깊은 하늘이 주상을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돌아보시는 것을 공경으로 專一하여 그침이 없게 하시며 밖으로는 정치를 닦아 행하시는 것을 성실히 하는 것으로 專一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없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臣이 두려워하건대 否와 太가 서로 극이 되며 禍亂이 서로 이어서 수백년 동안 昇平하신 끝에 나라의 근심거리가 장차 날로 지금의 폐단보다 배로 생겨서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도리어 전하께는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批答하시되 “내가 疏章을 보니 卿의 도덕은 옛 사람에게 叱正하여도 또한 그 짝 될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 무릇 이 여섯 조목은 진시로 千古의 지극한 말이며 當今에 급히 힘 쓸 일이니 내가 비록 末하나 감히 가슴에 담지 않겠는가?” 하셨다. 병으로 말미를 받아 있으면서 본 벼슬과 겸직인 大提學을 사양하시고 인하여 “崇政을 더한 것을 원하는 대로 개정하여 주십시오.” 하셨으나 듣지 않으시고 의원을 보내어 병이 어떠한지 물으셨고 선생께서 잇달아 사양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伸縮, 24일에 대궐에 나아가 大提學을 힘써 사양하여서 세 번이나 말씀드렸으나 듣지 않으시므로 이튿날 또 굳게 사양할 것을 그치지 않으시니 그 때에야 사직을 허락하셨다. 癸卯, 26일에 다시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시고 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게 하시니 大提學을 갈았던 까닭에 다시 批答을 내리셨다.

9월 초하루에 獻官으로 康陵에 제사지내셨다.<康陵은 明宗의 능이다> 己酉, 3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啓事하셨다. 그 때에 軍籍을 정리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아뢰기를 “山陵을 겨우 치르고 또 天使도 금방 겪었으며 失農도 하였으니 軍籍을 정리할 때가 아닙니다.” 하시고 인하여 前에서 箚子를 쓰면서 말씀하시기를 “군사를 搜括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는 것은 마땅히 급한 일입니다. 다만 작년 이래로 국상과 산릉의 큰 役事가 잇달아 있었고 天使가 와서 백성이 困弊하였으며 올해에는 또 바람과 가뭄의 災變이 있었으며 날으는 황충(蝗蟲)이 하늘을 가리어 사방에서 災傷을 근심하며 救荒을 근심하는 글이 서로 이어 그치지 않거늘 나라에서는 일찍이 한 번도 號令한 정사를 내어 백성들을 구하는 방책은 세우지 않고 바야흐로 집마다 더듬으며 戶마다 뒤져 협박하고 몰며 침노하여 독촉하기를 성화같이 급하게 하니 나라의 근본이 어찌 요동하지 않겠습니까? 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잠시 그치고 세월이 풍년들고 백성이 쉰 후를 기다려 그 때 하는 것이 의리에 옳지 않을까 합니다.” 또 말씀하시되 “옛날의 聖王은 궁중의 일을 조정에서 參豫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어서 宦官과 宮妾이 다 유능한 재상에게 거느려지게 하였고 諸葛亮이 後主께 아뢰기를 ‘궁중과 府中이 다 일체가 되어서 옳으며 잘못된 것에 높여 주며 벌주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간사한 일을 하였거나 법을 범하였거나 또는 충성하고 어진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有司에게 붙여 그 형벌과 상을 의논하여 공평하고 밝은 정치임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니 편벽되게 사사로운 정으로하여 안팎의 법이 다른 것은 옳지 않다.’하니 또한 이 뜻입니다. 만일 ‘안의 일을 바깥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다.’하면 이것은 심히 옳지 않는 것입니다.”하시고 인하여 朱子가 효종에게 올리신 글 가운데서 한 대목을 각별히 기록하여 올리셨는데 그 때에 늙은 궁인인 石尙宮이라 하는 자가 있어 先祖 때부터 안팎을 교통하여 정사에 干豫한 죄가 있어 臺諫에서 의논하는 바가 된 까닭에 선생께서 그것에 미친 것이니 주상께서 다 받아들이시고 명하여 軍籍 정리를 그치라고 하셨다. 壬子, 6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程子의 四箴을 나아가서 강의하셨다. 강의를 마치시고 아뢰기를 이 四箴은 顔子가 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章에 있으니 孔子 문하의 많은 제자들에게 仁을 가르치신 것이 매우 많으나 오직 顔子만이 이것을 얻어들었기 때문에 朱子께서 말하시기를 ‘聖門의 心法을 전수하는 切當하고 중요한 말이다.’하였습니다.하시고 인하여 고사를 인증하여 切當히 강의하시고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이것은 진실로 지극한 말이니 마땅히 좌우에 두고 날마다 살펴야 할 것이니라.” 하셨다.

乙卯, 9일에 朝講에 入侍하여 論語集註를 강의하심에 周易을 배우면 吉하며 凶하며 사라지며 자라나는 이치와 나아가며 물러나며 있으며 망하는 道가 밝게 된다 하는 말에 이르러 선생께서 그 뜻을 미루어 아뢰기를 “六四卦에 주역의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우선 乾卦를 말씀드리면 첫 爻는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고 하였고 둘째 爻는 보이는 용이 밭에 있다고 하였고 셋째 爻는 아래 卦의 가장 위에 있으므로 용으로써 취하여 卦象으로 삼지 아니하여 다만 경계할 뜻을 일렀고 넷째 爻는 혹 뛰며 못에 있다 하였고 가장 위에 있는 爻는 자리가 너무 높아 극하므로 말하기를 귀하나 지위가 없고 높으나 백성이 없어 가장 높이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는 象이라고 하였으니 人君이 만일 높은 것으로 자처하여 어진 사람은 간만히 하며 스스로 성인인 체하여 혼자만의 외로운 지혜로 세상을 제어하며 아랫사람에게 자기를 낮추는 뜻이 없으면 이 형상에 응하여 궁한 재앙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겸허하여 묻기를 좋아하며 德을 같게 하여 서로의 일을 도와야만 亢極한 재앙을 면할 것입니다. 繫辭에 말하기를 위태롭다고 하는 자는 그 지위에서 평안한 자요, 망할 것이라고 하는 자는 그 있는 것을 보존하는 자이며 亂하다고 여기는 자는 그 다스릴 수 있는 자라하시고 또 말하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는 이는 包桑에 매여있다 하시니 人君께서 이것을 아신다면 가히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시고 또 여쭈기를 “지금 나아가 강의한 것은 성현의 지극하신 말씀이나 한갖 음과 뜻과 句讀만 알고 스스로 얻은 실상이 없으면 유익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를 않으면 위태롭다.’ 하셨는데 그 뜻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마음에 구하지 않으므로 아득하여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않으므로 위태로워서 평안하지 못하다’ 하니 모든 經書에 다 통하여도 마음에 얻는 실상이 없으면 아득하여 얻는 것이 없고 마음에 생각하여도 익히지 아니하면 위태로워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延平께서 朱子께 이르시기를 ‘이 도리는 온전히 날마다 쓰는 것의 익힘에 있으니 날마다 쓰면 움직이며 가만히 있으며 말하며 침묵하는 사이에 마음을 두고 살피며 그 일에 익숙한 후에야 아는 것이 실로 얻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학문이다.’ 하셨습니다.” 하셨다. 庚申, 14일에 晝講에 入侍하셨다. 선생께서 전날에 말씀하신 것 중 亢極한 용이 뉘우치는 것이 있다 하는 것은 그 뜻을 오히려 다 말하지 못하였다 하며 또 각별히 箚子를 지어 강의를 마치고 나아가 읽으시니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계하라는 것은 내 마땅히 경계를 삼겠노라.” 하셨다. 그 때에 申士楨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주의 아들이었다. 자기 아버지께 불효하여서 臺諫이 바야흐로 疏를 올려 아뢰며 죄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아뢰기를 “요즈음 臺諫의 의논하는 바가 혹 집안 일을 간섭하며 혹 사사로운 일에 관련된 것이라 하며 즐겨 듣고 허락하지 않으시니 한 가지 일에도 이와 같고 두 가지 일에도 이와 같아서 쌓여 그치지 않으면 사사로운 일이 공변된 것을 이겨 없애는 것에 이르면 어지럽고 망할 조짐이 이에 말미암을 것입니다. 綱常이란 것은 우주를 부지하는 기둥과 대들보와 같은 것이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주석과 같은 것이거늘 臺諫이 이 일 때문에 의논하는데에도 듣지 않으시면 주추와 기둥과 대들보가 부러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臣이 無狀하여 文翰의 소임과 史局의 중한 책임을 다 감당하여 수행하지 못하고 오직 잠시나마 經筵에는 출입할 수 있을 것인데 겨울이 몹시 차가워 또한 장차 감당하기 어려우니 국사를 수행하지 못하면서 한갖 國祿만 먹는 것은 市井사람이 利만 보고 염치는 돌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조정은 臣을 士大夫라 부르는데 臣이 市井사람으로 자처하면 의리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시고 인하여 물러나기를 비심을 심히 간절히 하셨으나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르시기를 “상하가 바야흐로 卿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셨다. 그 때에 주상께서 선생께 기울여 향하시기를 심히 간절히 하시고 선생께서도 학문을 권하며 강론하는 것 외에도 정사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홀연히 일을 좇으며 진술하여 아뢰시고 비록 宮禁과 戚屬에 관계된 일이라도 또한 주상을 위하여 아뢰시고 주상께서는 또한 마음을 비워 아름답게 여겨서 따르시고 말마다 들으며 계획마다 좇겠노라 하시는 上敎를 내리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오히려 늙고 병이 들어 소임을 다할 수 없다고 하시며 늘 물러갈 뜻을 두시니 士大夫들이 선생께서 가시며 머무르시는 것으로 世道의 낮으며 높음을 점쳐서 오직 나라를 버리고 가는 것을 빨리하여 그 배우신 것을 다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다. 이 날 臺諫에서 거론된 일을 다 들어주시니 이는 선생께서 계를 올린 힘 때문이었다. 實錄撰集都廳堂上으로 임명되셨다. 總裁官 洪暹이 여쭈기를 “李滉은 斯文의 옛 선비이니 의논하여 붓으로 써서 칭찬하고 각아내리는 데에 가히 이 사람같은 이는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까닭이다.<實錄은 明宗朝에 하셨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丙寅, 20일에 대궐에 나아가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하기를 “卿이 만일 벼슬을 그만두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일을 하겠는가? 겨울철이라 병을 면할 수 없으면 완전히 소임을 폐하여도 무엇이 미안하겠는가? 원하건대 사양하지 말라 하시고 인하여 내일 夕講에 入侍하라.” 하셨다. 丁卯, 21일에 夕講에 入侍하셨는데 주상께서 묻기를 “요즈음 조정의 의논이 趙光祖에게 관직을 追贈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의 학문과 행했던 일이 어떠한 것이었나?” 하시니 선생께서 아뢰기를 “光祖가 天稟이 빼어나서 일찍이 뜻을 性理學에 두고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습니다. 中廟께서 다스림을 구하시기를 목마른 데에 물 생각하듯 하시어 장차 三代 때의 다스림을 이루려 하셨으므로 光祖가 또한 세상에서도 드문 만남이라 하여 金淨 金湜과 奇遵과 韓忠등과 더불어 서로 힘을 한 가지로 쓰며 마음을 같이 하여 크게 更張하였고 조목과 법을 설립하고 小學으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법으로 삼고 또 呂氏鄕約을 거행하고자 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바람에 움직이듯 하였는데 만일 오랫동안 폐하지 않았던들 다스리는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 때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다스림에 이르기를 급하게 생각하여 빨리 하고자 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고 옛 신하들 중 물리침을 본 자가 벼슬을 읽고 怏怏하여 일백 가지로 꾀하여 틈을 살펴 망극한 참소로 얽어매어 일시에 어진 선비의 무리들을 혹 귀양 보내고 혹 學行에 뜻을 두는 사람을 싫어 하는 자들이 홀연히 지목하여 ‘己卯士禍 때의 무리다.’ 하니 인심이 누가 禍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士風이 크게 더럽혀져서 이름난 선비가 나지 않는 것은 이 일 탓입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전번에 弘文館에서 南袞의 벼슬을 죄상에 따라 삭탈하여야 한다 하니 이것은 또한 어떻게 된 일인가?” 선생께서 아뢰기를 “己卯士禍는 바로 南袞과 沈貞의 간사함에 말미암아 끝내 中廟의 누가된 것이니 가히 죄가 하늘에 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의 뜻은 先廟 때의 대신을 죄상에 따라 관직을 삭탈하기가 미안한 일이 아닌가 하시는 것이니 심히 忠厚한 뜻이나 모든 의논된 바는 어진 일을 나타내고 나쁜 일을 치는 일이니 光祖를 追贈하시고 죄상에 따라 南袞을 죄 주시면 是非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주상께서 명하여 대신에게 收議하게 하시고 弘文館과 兩司와 政院으로 하여금 각각 南袞의 죄상을 진술하라 하시고 드디어 南袞의 관직을 삭탈하셨다. 10월 초하루에 慕義殿에 陪祭하셨다.<명종의 魂殿>

선생께서 아뢰기를 근래에 日食이 있었고 또 겨울인데 천둥의 변괴가 있었습니다. 先王께서는 災變을 만나면 두려워 몸을 기울여 德을 닦았으니 가히 文具만을 행하여서는 상천을 감동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詩經』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이 나타나신다. 높고 높은 위에 계신다고 말하지 말라. 그 일을 오르내리며 날마다 보시는 것이 이에 계신다.’ 하니 대개 하늘은 곧 이치이며 하늘의 이치는 흘러서 행하며 그렇지 않을 때가 없으니 사람의 욕심이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생기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中庸』에 또한 말하기를 ‘神의 생각을 가히 헤아리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생각하여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고 孟子께서 이르시기를 ‘그 마음을 잡아 性을 기르면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하니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다만 마음과 性을 잡아 기르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 宋나라 때에 張橫渠께서 지으신 『西銘』에 이 이치를 말한 것이 심히 분명한데,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써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히셨으니 그 속으로 미루어가면 성인의 지위에서의 일이고 아래에서부터 인사를 배우는 공부도 겸하여 다하지 않을 것이 없으나 이를 안 후에야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밖에서 假借하여 꾸미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실한 공부를 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하여 청하시기를 “小學 강의를 마친 후에 『西銘』을 강의하겠습니다.” 하시니 “그렇게 하라.”하셨다. 또 아뢰기를 董仲舒가 한 말이 있으며 ‘人君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로써 조정과 百官과 만민을 바르게 하여 그로써 사방에 이르면 멀며 가까운 데에 바르게 하기를 한결같이 하지 않는 것이 없어 邪慝한 기운이 그 사이에 干犯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로써 음과 양이 조화되고 바람과 비가 제 때에 불고 내리며 가히 모든 복된 물건과 日月祥瑞가 다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위로는 人君의 마음에서부터 아래로는 조정의 百官과 만민에 이르기까지 바르지 않는 것이 없으면 어찌 邪慝한 기운이 干犯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人君께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도 많은 공부와 節目이 있으니 만일 다만 한 두 가지 끝에 있는 일만 고쳐서 災變을 없애고자 한 즉 가히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셨다. 庚子, 25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董生行을 강의하시고<董生行은 小學에 있는 글이니 董生의 집에 새끼를 낳은 개가 나간 뒤 새끼가 울거늘 닭이 벌레를 물어서 먹이는 일이 있는지라. 글 짓는 사람이 그 董生이 어질므로 그런 祥瑞가 있다 하였다>아뢰기를 “和한 기운이 상서로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감동하는 바가 있으면 왕왕 상서로움에 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한 것이 德에 있고 상서로움에는 있지 않으니 진실로 德이 없으면 상서로움이 무엇이 귀하겠습니까?” 하셨다.

11월 戊申, 4일에 夕講에 入侍하셨다. 이날 小學을 강의하시고 아뢰기를 “小學과 大學은 聖學의 始終이니 마땅히 예전에 배운 것을 익히고 새 일을 아셔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비록 小學을 다 강의하였으나 또한 항상 유념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공부는 능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이 근심이 아니라 능히 물러나서 걷지 못함이 근심이다.’ 하였으니 물러나서 걷는다는 것은 물러서서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배운 것을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것을 익히는 공부가 깊고 지극하면 새 것을 아는 공부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癸丑, 9일에 弘文館에 들어가서 西銘을 교정하셨다. 그 때에 장차西銘을 강의하려 하는 데에 대신이 나아가 청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나아가서 읽으시게 하여주십시오.”하거늘 선생께서는 “衰病하고 氣乏하여 말소리가 低微하여 족히 주상께서 들으시도록 가르쳐 깨우치게 하지 못한다.” 하시며 사양하셨는데 대신이 다시 청하여 관원이 모두 같이 “교정한 후에 進講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명을 받들었고 또 西銘考證을 만들어 그로써 참고로 삼게 하셨다.

庚申, 16일에 병으로 말미암아 사직하셨는데 명하여 말미를 주시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시고 음식물을 주시고 己巳, 25일에 또 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물으셨다. 12월에 재삼 辭狀을 올리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庚寅 16일에 聖學十圖와 箚子를 올리시니 첫째는 太極圖요 둘째는 西銘圖요 셋째는 小學圖요 넷째는 大學圖요 다섯째는 白鹿洞規圖요 여섯째는 心統性情圖요 일곱째는 仁說圖요 여덟째는 心學圖요 아홉째는 敬齋箴圖요 열째는 夙興夜寐箴圖이었다. 주상께서 “학문을 하는 데에 심히 切當하다.” 하시며 병풍을 만들어서 들이라고 명하셨다. 戊戌, 24일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시고 사직하셨는데 허락하지 않으셨다.
1569년선생 69세
정월 庚戌, 6일에 吏曹判書를 제수하셨는데 나아가지 아니하시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시니 허락하여 갈으시고 다시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셨다. 甲子, 20일에 대궐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시고 인하여 田里에 돌아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날에 文昭殿의 의논이 일어났다.

처음에 世宗께서 漢나라 때의 原宗의 제도를 依倣하여 文昭殿을 세워 四親과 <四親은 高祖의 신주이다> 太祖의 신주를 모셔와 한 집에 室을 다르게 하여 서쪽으로써 위를 삼고 四時에 제사가 있으면 앞 전각에서 합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太祖가 가운데에 계셔 남으로 향하시고 高祖.曾祖.祖.父 네 분은 동서로 벌려 앉게 하여 昭穆의 제도같이 하였다. 成宗께서 德宗을 追崇하셨으나 叡宗을 文昭殿에 들여 모셨기 때문에 德宗을 別殿에 모시고 이름을 延恩殿이라 하였다. 仁廟께서 승하하시고 明廟께서 왕위에 오르심에 이르러 여론이 있으되 仁宗을 들여 모시면 世祖께서 마땅히 遷하실 것이로되 明廟께는 친히 다하지 아니하시고 遷하지 않으시면 다섯 간이 되니 世宗의 뜻이 아니라고 하여 이에 仁宗을 延恩殿에 모시니 이는 그 때에 李와 尹元衡 등이 나라 일을 맡아서 그 의견을 주장한 것으로 이에 사람들이 다 痛憤하므로 지금에 이르러 대신 李浚慶이 의견을 올리되 “仁廟께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그 때의 모든 신하들이 예의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함에 잘못하여 文昭殿에 뫼시지 아니하고 別廟에 모시니 物議가 憤鬱하여 이 일이 족히 천지간의 和한 기운을 느껴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되 明廟를 사당에 들여 모실 때에 틀림없이 文昭殿에 들여 모실 것이니 이 일은 의리에 심히 밝다 하되 다만 仁廟와 明廟는 더불어 마땅히 같은 代이시어 자리 수가 조금 늘어나므로 文昭殿 옛 집의 그 간수를 조금 늘려야 가히 奉安하실 것이니 臣 등이 禮官과 더불어 청하옵건대 먼저 집의 形止를 奉審하여 미리 닦아 지어야합니다.” 하므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 때에 河東郡夫人의 喪事를 맞아 返魂하게 되었을 때 사삿집에 家廟를 세우고자 하여 2品 이상에게 명하여 의논하라 하시거늘 선생께서 의견을 말씀드리기를 “追崇하는 모든 일은 마땅히 國喪 3년 뒤에 한결같이 宋나라 때의 僕왕과 秀 왕의 옛 일대로 하여야 할 것이나 오직 家廟만은 지금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하셨다. <河東郡夫人은 宣祖大王을 낳으신 부인이시다>

2월 초하루에 慕義殿에 陪祭하시고 己卯, 5일에 春秋館의 史館에 들어가서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世宗實錄을 펴내어 文昭殿의 儀軌를 상고하시고 政院에 나아가 家廟 그림과 箚子를 올리셨다. “殿안의 太祖께서는 東向하시고 좌우로 昭穆께서 남북으로 향하여 앉으시면 집을 고쳐야 할 일도 없고 땅이 좁아 거행하기 어려운 근심이 옛 예에 합당하여 奉先하는 道에 진실로 편리하고 합당할 것입니다.” 하셨으므로 주상께서 즉시 引見하시어 자세히 물으시거늘 선생께서 펴서 대답하시기를 箚子의 뜻과 같이 하시므로 명하여 대신과 禮官에게 의논하라고 하셨다. 선생께서 물러나와 또 옛 사당의 그림을 올리시니 대신과 禮官이 모두 의논하기를 “殿 안의 제사하는 의례와 옛 예를 따르지 아니하시니 世宗께서 효도 생각이 무궁하셔서 살아계실 때 朝夕으로 섬기는 공경을 펴시어 신주가 앉아계시는 자리의 向背規式을 이미 정하시어 그후 140년 동안 실행하던 제도를 하루 아침에 고치는 것은 일 자체가 거북한 것입니다.” 하므로 선생의 의견을 실행하지 못하셨다.
乙未, 21일에 朝講에 入侍하셨고 己亥, 25일에 宣仁門 밖에 나아가 箚子를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고 壬寅, 28일에 또 箚子를 올리셨으나 또 허락하지 않으셨다. 議政府右贊成을 제수하셨는데 肅拜하지 않으시고 궐문 밖에 가서 힘써 사양하시니 가라고 허락하셨다.

3월 丙午, 2일에 또 대궐에 나아가 兼帶한 직책을 다 갈고 致仕하여 “시골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께서 가실 뜻을 이미 결정하셨기에 연일 계속해서 대궐에 나아가 힘써 사양하셨는데, 그 때에 장차 주상께서 慕義殿에 친히 제사지내니 政院에서는 선생께서 드디어 가실까 두려워하여 아뢰어 “제사를 지낸 후에 引見하시고 보내십시오” 하고 청하므로 주상께서 注書 兪大修에게 명하여 뜻을 알리셨다.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심에 戊申, 4일에 詣闕하여 은혜에 감사드리고 夜對廳에 들어가서 대하시며 물러가기를 간절히 비시니 주상께서 허락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引見하시어 힘써 머무르시기를 두세 번 권하셨으나 선생께서 물러가기를 더욱 간절히 비시므로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卿이 이제 돌아간다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지 않겠는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스려지는 세상을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긴다.” 하였으니 대개 明主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治世에는 가히 근심된 것을 막을 것이 없으니 絶人한 자질이 있으면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리며 신하를 업신여기고 근심을 미리 막지 않으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니 이것은 가히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시절이 비록 治平한 듯하나 남쪽과 북쪽에는 틈이 있고 백성은 困乏하고 마을과 창고는 비어 장차 나라의 몰골이 되지 못하게 되어서 만일 갑자기 事變이 생기면 土崩瓦解할 조짐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그 후 24년 만에 壬辰倭亂(1592)을 당하였다> 성상의 자질이 高明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주가 성상의 뜻에 차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하고 處事하는 가운데 혼자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는 점이 없지 않으시니 識者가 미리 근심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신이 전번에 올린 바 乾卦에 ‘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고 亢龍은 뉘우침이 있다.’ 하는 말이 있는데 ‘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 하는 것은 人君의 극히 높은 자리인데 그 위에 또 자리가 있으면 너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스스로 高亢하고자 하여 즐겨 신하와 더불어 마음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며 德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 아래에 있어 도울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亢龍이 有悔니라.’ 하는 것입니다. 용이 物 이룸은 구름으로써 그 변화를 신묘하게 하여 恩澤이 만물에 입히게 되는 것이니 人君이 아랫사람과 더불어 마음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며 德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면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니 비록 그 변화를 신묘하게 하여 恩澤을 만물에게 입히고자 한들 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임금의 덕에 있어 큰 변입니다.

무릇 태평이 지극하면 반드시 亂이 생길 조짐이 있을 것인데 지금이 태평하다고 하여 일에 혹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배를 잡아 물을 거슬려 올라가다가 손을 놓을 때에 흐르는 물을 따라 아래로 따라 내려가 풍파를 만나면 뒤집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하는 공을 그만두지 않고서야 사사로운 뜻을 가히 이겨서 이러한 변통이 저절로 사라져 풀어질 것입니다. 성인의 일천 말과 일만 말은 存心하는 법이 아닌 것이 없으나 역시 요점을 아는 것이 귀합니다. 臣이 전에 드린 聖學十圖는 臣의 사사로운 소견이 아니고 모두 옛 어진 사람들의 소견이며 臣은 다만 그 사이에 한 두 가지 道를 보충했을 따름입니다. 그 공부는 전에 드린 箚子에서도 생각 思자와 배울 學자로써 주를 삼은 것으로 이것으로써 생각을 이루신 즉 얻으신 바가 더욱 깊어 사업에 발휘하실 것이니 가히 소신의 충성하려는 생각에서 가르침을 드리는 정성을 아실 것입니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心統性情圖는 세 개가 있는데 가운데 그림과 맨 아래 그림은 卿이 그린 것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程復心의 四書章圖에 이 그림이 있는데 위의 한 그림은 바로 程復心의 그림이고 그 나머지 理와 氣를 나눈 것에 말이 많이 온당하지 않으므로 버리고 孟子와 程子와 朱子가 의논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누어서 중간과 아래 그림을 그렸는데 本然之性은 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며 氣質之性은 理와 氣를 겸하여 말한 것이고 情에 대해 말한 것으로 理를 쫓아 발한 것은 四端이며 理氣를 합하여 발한 것은 七情입니다. 그러므로 가운데 그림은 本然之性으로 四端을 주로 하여 만들었고 아래 그림은 氣質之性으로 七情을 주로 하여 만든 것이니 이것은 비록 臣이 만든 것이나 모두 성현의 말씀을 끌어와서 만든 것으로 臣이 망령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성정을 거느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西銘』에 이르시기를 ‘천지의 막힌 것을 내 몸으로 삼았고 천지에 主한 것을 내 性으로 삼았다.’ 하니 기운은 형제가 되고 理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理와 氣가 합한 것이 마음이 되어 한 몸의 主宰가 되니 性情을 거느린 것이 아니겠습니까?<主는 性을 말한 것이고 宰는 情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이 性을 담는 것은 마음이고 내어 쓰는 것 또한 마음이니 이것은 마음이 性과 情을 거느린 까닭입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또 물으시기를 “그림 안에 虛靈 이 두 자가 위에 있고 知覺 이 두 자가 아래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虛靈은 마음의 본체이고 知覺은 사물을 응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할말이 없느냐?”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 祖宗은 은혜가 깊으시며 혜택이 두터워서 공과 德이 높으시지만 다만 士林之禍가 중엽에 일어나니 廢朝때의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中廟朝의 己卯士禍 때에는 현인과 군자가 다 대죄를 입어 이로부터 邪와 正이 서로 섞이어 간사한 사람이 뜻을 얻어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는 반드시 말하기를 ‘己卯 때의 남은 習이다.’ 하여 사람의 화가 연속해 일어났으니 예로부터 이같은 때는 있지 않았습니다. 明廟가 나이 幼하시고 권세있는 간신이 뜻을 얻어 한 사람이 패하면 또 한 사람이 나서서 서로 잇달아 일을 일으키니 사화를 차마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臣이 이미 지나간 일을 아뢰는 것은 장래에 큰 경계로 삼으시게 하고자 함입니다.

예로부터 人君이 처음에는 정사가 淸明하므로 바른 사람을 등용하여 쓰나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간하며 잘못이 있으면 다투므로 人君이 반드시 厭苦하는 뜻이 새기게 됩니다. 이에 간사한 사람들이 틈을 타 逢迎하여<人君의 뜻을 맞이하는 것이다> 人主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만일 이 사람을 쓰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라 하여 이로부터 소인과 더불어 뜻을 합하여 正人이 손 닿을 데가 없게 된 후에야 간신이 뜻을 얻어 벗을 부르면 무리를 모아서 인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지금 새로 정사하시는 처음에 무릇 간하며 논하는 바를 다 뜻을 굽혀 쫓으시니 큰 허물이 없으시나 오래됨에 주상께서 혹 마음을 바꾸시면 어찌 능히 오늘 같으실 것을 능히 보증하겠습니까? 이 같으면 邪와 正이 장차 서로 나누어져 간사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길 것이니 처음의 정사에서 크게 상할 것입니다. 唐나라 玄宗의 開院 때에 姚崇과 宋璟 등의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그로써 태평세월을 이루었으나 玄宗이 욕심이 많은 것으로 말미암아 군자는 다 물러가고 소인만 머물러서 天寶의 난을 일으키니 한 나라의 임금의 몸으로 그 일에 두 사람이 같게 된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였고 나중에는 소인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상께서는 이 일로써 큰 경계를 삼으셔서 어진 무리를 보호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構陷하지 말게 하시면 이것은 宗社와 신민의 복이니 臣이 경계하고 아뢰고자 하는 것에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러준 말을 마땅히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시고 또 물으시기를 “卿이 조정의 신하 가운데서 가히 천거할 만한 이가 없는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기를 “오늘날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자는 다 맑고 삼가하며 六卿에는 邪慝한 사람이 없으며 首相에 이르러는 危疑한 때를 당하여도 聲色이 변하지 않음에 진실로 柱石같은 신하이니 마땅히 비교해서 중요하게 여길 사람은 뜻하옵건대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首相은 영의정 李浚慶이고 聲色은 소리와 얼굴빛이다> 주상께서 또 학문하는 사람을 물으심에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程子께 묻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제자 중에 누가 얻음이 있습니까?’ 하거늘 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얻은 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시니 그 때에 游酢와 楊時와 謝良佐와 張繹과 李와 尹焞 등 여러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나 程子께서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臣이 어찌 감히 위로 天日을 속여 어느 사람이 얻은 바가 있다 하겠습니까? 奇大升같은 이는 글을 많이 읽었고 또한 理學의 소견이 빼어나 통한 선비이나 다만 收斂하는 공부가 적습니다.” 아뢰기를 마치시고 드디어 물러나시니 豹皮의 요 한 벌과 胡椒 두 말을 주시고 李道로 하여금 쌀과 콩을 주라고 하시고 또 명하시어 가는 길에 말과 배 끄는 사람을 주어 돌아가는 것을 보호하라고 하셨다.

午正에 漏水가 내리거늘 拜辭하시고 성으로 나와 東湖夢賚亭에서 자고 己酉, 5일에 배를 타고 동으로 돌아가 奉恩寺에서 주무셨다. 명사들이 조정을 비우고 나와서 전송함에 각각 글을 지어 이별하여 보내니 선생께서도 글을 지으시길

배에 벌여 앉으니 모두 勝流라
날저물어 돌아가고자 하나 마음은 머물러 있네.
원하건대 한강물을 가져다가 벼루에 부어서
이별에 임한 한없는 시름을 그려 내고자 하노라.

하셨다. 庚戌, 6일에 楊州의 無任浦에서 주무시고 申酉, 17일에 집어 도착하셨다.

4월 글을 올려 물러나서 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먹을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고 인하여 벼슬을 갈아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처음 선생께서 조정에 계실 때에 사방사람들이 풍채를 想望하기를 바랐었는데 물러가심을 들음에 朝野<조정과 들이다>가 缺然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執義 權德與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현자의 가며 머무는 것에 인심의 향하며 등짐이 달려 있으며 국가의 存亡이 매여 있습니다. 지난 번에 判府事 李滉이 글을 올려 해골을 빌어 왕명을 기다렸거늘 政院이 아뢰기를 ‘비록 보내지 않을 수 없겠으나 원하옵건대 引見하여 보내소서.’ 하였고 引見하시는 날에 이르러 곧 바로 馬을 주십시오 하고 여쭈거늘 주상께서 未穩한 뜻을 전교하신 즉 또 곡히 물러가기를 비는 연유를 진술하셨는데 이는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政院이 허락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때를 당하여 政院에서 현자의 가며 머무는 것이 인심과 국가의 向拜와 存亡에 매여 있는 까닭을 아뢰고 또 聖學이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가히 이 사람으로 하여금 經筵에서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진술하여 주상을 인도하여 굳이 잡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지성으로 머무를 것을 청하시게 했다면 李滉이 비록 가고자 한들 가히 갈 수 있었겠습니까? 臣이 살펴보니 詩傳 小雅의 白駒篇은 어진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 그 첫장에 이르기를 ‘밝고 밝은 흰 망아지가 우리 마당의 나물 싹을 먹는다 하여 매고 얽어서 오늘 아침을 길게 하여 이른바 이 사람이 이에 머물게 되리라.’ 하였고 그 둘째 장에 말하기를 ‘맑고 맑은 흰 망아지가 우리 마당의 명아주를 먹는다 하여 매고 얽어서 오늘 저녁에 길게 하여 이른바 이 사람이 이에 머물게 되리라.’ 하였고 셋째 장에는 말하기를 ‘皎皎한 白駒가 賁然히 오면 너를 공작이라 하며 너를 후작이라 하여 평안하고 즐겁기를 기약이 없게 하리라.” 하였으니 너의 優遊함을 삼가며 너의 가려하는 생각을 힘쓰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하여 좋은 벼슬로 족히 얽매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며 머물기를 지극히 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생각하지 않음이니 이 일로써 보건대 옛 사람들이 현자가 가는 데에 머물게 하고자 함을 일만 가지로 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또한 한가하게 생각하지 못함이 이와 같거늘 지금은 망아지를 매자는 사람이 있으나 듣지 못하고 도리어 馬을 주자는 청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李滉이 어진 신하인 것으로 의논하지 말고 학문하는 일로써 말하건대 지금 세상에서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의 정력이 다 학문에 있어 진실로 알고 실천하여 공부가 이미 이루어졌고 恬淡하고 안정하며 스스로 지켜 밖을 생각하지 않으니 진실로 선비의 높은 태도이며 斯文의 宗匠입니다. 그 여섯 가지 조목을 진술한 것과 열 가지 그림을 드린 것과 자못 일을 좇아가며 손수 箚子를 올리며 글을 의논하며 입으로 대답하여 아뢴 것을 보니 식견이 높으며 깊고 의논이 精하고 순수하고 綽綽이 그 연원이 있고 결단코 俗學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간절하고 위태한 정성은 오직 학문을 열어내어 인도하는 것에 있으니 이 進講하기가 바야흐로 급한 때를 당하여 經幄의 옛 신하를 구하고자 할 것인데 이 사람을 버리고 그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이 같은 사람이 비록 前代에 있어도 오히려 만나지 못함을 한할 것인데 하물며 같은 때에 한 세상에 나서 도리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전날 청하여 올라올 때에 전하께서는 일념이 오로지 현자를 좋아하는 것에 있으셨고 조정에서 상하를 다 돌보지 못할까 걱정하셨는데 이제 이미 돌아간 뒤에도 전하의 일념이 여전히 전과 같으심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朝野의 장차 흩어져 歸宿할 바가 없을가 臣은 두렵습니다.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현자가 있지 않으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으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인심이 향하며 등 돌리는 것을 살피시며 국가가 유지되며 망하는 연고를 경계하셔서 돈독히 생각하여 善을 좋아사시며 몸을 責하여 어진 이를 부르시고 모든 사람의 情을 매어서 그로써 큰 업의 터를 삼으시면 종사에 심히 다행하고 生民에게도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이 일로 말미암아 벼슬 갈기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有旨를 내리시기를 “卿이 전부터 물러가기를 간절히 비니 뜻을 빼앗기가 어려울 듯 함에 이 때문에 그대로 허락하여 卿의 뜻을 평안하게 한 것이다. 致仕를 허락하지 않으며 벼슬을 갈지 않음은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니 卿이 마땅히 알고 있으라.”하셨다.

7월에 川谷書院의 두 선생 祝文을 지으셨다.
9월에 盧伊齋가 喪禮를 의논한 글에 회답하셨다.

1570년~

1570년선생 70세
정월에 전문을 올려 致仕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비시고 아울러 글을 올려 벼슬을 갈아주십시오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諭旨에 이르시기를 “卿의 나이 70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이에 감히 듣지 않고 그 벼슬을 갈지 않는 것은 卿의 어진 德을 생각하여 여전히 정간을 이룬 것이지 사양하여 물러감을 허락한 것이 아니므로 조정에 돌아올 기약을 날마다 바라니 乘馹하고 올라와 내가 바라는 것을 도우라.” 하셨다. 3월에 또 전문을 올려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인하여 乘馹하고 올라오라고 하셨다. 4월에 召命을 사양하시고 다시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고 잇달아 사양하셨으니 허락하지 않으셨다.

5월에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易東書院에 모였었다. 陶山에 나가셔서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心經을 강론하셨다. 8월에 易東書院에서 落成式을 하므로 가셨다. 9월에 전문을 올려 致仕하기를 비시고 글을 올려 벼슬을 사양하셨는데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만 兼帶한 校書館과 活人署의 提調만을 갈으셨다. 다시 陶山에 나가셔서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啓蒙과 心經을 강론하셨다. 10월에 奇明彦에게 편지하여 心經情圖를 의논하셨다.

11월에 병으로 피곤하시므로 모든 선비들을 사례하여 보내셨다. 柳應見이 精舍에 있으면서 보내온 세 절귀에 화답하신 것이 있는데 그 중 한 수에 이르시기를

공자같은 성인도 오히려 마음을 가리는 사람을 箴規하셨고
曾子께서 이르시기를 글로 모여 서로 도와 仁을 이루는도다.
늙어감에 다시 학문을 하는 데에 소홀한 것을 깨달으니
속절없이 돌아온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봄을 기다리노라.
하셨다.

家廟에서 時祀를 행하셨다.
그 때에 선생께서는 이미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자제들이 參祭하지 마시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늙었기 때문에 제사지낼 날이 많지 않으니 가히 참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고 을 받들고 제물을 올려 스스로 執事하셨기에 기운이 더욱 不平하셨다. 己卯, 16일에 奇明彦의 편지에 화답하시어 致知格物說을 고치셨다.

12월 丙申, 3일에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사람들의 서적들을 기록해서 돌려 보내라고 하셨다. 경계하여 잃어버리시지 말라고 하셨고 그 대에 자제가 奉化縣監이 됨에 명하여 監司께 辭狀을 내라고 하셨으며 집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丁酉, 4일에 형의 아들 寧에게 명하여 遺戒를 쓰게 하시니 “첫째는 禮葬을 사양할 것이고 둘재는 碑를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게 그 전면에는 쓰기를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고 그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世系와 志行과 出處를 진술하기를 家禮 중에 있는 바와 같이 하라.” 하시고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 지으라 하면 서로 아는 奇高峯같은 이는 반드시 실지로 없는 일을 장황하게 써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므로 일찍이 스스로 뜻하였던 바를 닦아 내고자 하여 먼저 銘文만을 짓고 남은 것은 因順하여 마치지 못하였는데 草한 글을 여기저기 草 중에 섞여 간수하였으니 가려내어 그 銘文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보며 듣는 것이 사방으로 둘러서 있으니 너희의 行喪함이 다른 예가 아니므로 반드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물어야 거의 지금 세상에도 마땅하고 옛 예법에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셨고 그 밖의 것은 집안 일을 처리하신 두어 가지 사항이었다. 낮에 諸生 등을 보셨다. 자제들이 하지 말기를 권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죽고 사는 이 때에 가히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시며 명하여 웃옷을 덮게 하시고 諸生들을 불러 더불어 永訣하며 말씀하시기를 “평생에 그릇된 소견으로써 그대들 모두와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하였던 것은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셨다.

戊戌, 5일에 명하여 壽器를 준비하라고 하셨고 庚子, 7일에 문인 李德弘에게 명하여 서적을 맡게 하셨다. 이미 선생의 병세가 중하므로 문인들이 점을 침에 謙卦에 군자가 마칠 때가 되었다고 하는 爻를 얻었다.

辛丑, 8일 酉時에 正寢에서 돌아가셨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盆梅에 물을 주라고 하시고 酉時 초에 명하여 누우신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하시고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儼然히 돌아가셨다.

辛亥, 18일에 訃音이 주상께 올라가니 명하여 領議政을 追贈하셨다. 이보다 먼저 주상께서 병환 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내의에게 명하시기를 약을 지어서 가지고 역마를 타고 가서 구하라고 하셨는데 내의가 이르기 전에 선생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監司가 狀啓를 올려 아뢰니 政院에 전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李滉이 세상을 떠나니 내 심히 痛悼하노라. 가히 領議政을 追贈하고 致賻하는 모든 일을 빨리 前例를 상고하여 올려라.” 하시니 이에 禮官이 아뢰어 喪葬의 恩奠을 모두 議政禮 쓰기를 청하였다. 각별히 右副承旨 李齊閔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시고 또 右承旨 兪泓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시니 다 異數이다.

乙卯, 22일에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겸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를 追贈하셨다.
1571년
3월 壬午, 21일에 禮安 芝山 남쪽에서 장사지냈다. 子坐午向한 언덕으로 선생께서 사시던 곳에서 일리 가량 떨어진 곳이다. 첨정공이 遺戒로 두 번이나 글을 올려 힘써 禮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묘비에 새기는 것은 遺戒대로 써서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였다. 처음에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원근의 사람들이 匍匐하여 달려와 미처 弔喪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비록 평소에 일찍이 문하에 와서 수업하지 못한 자라도 또한 모두 거리마다 모여 弔哭하며 嗟歎하였고 어리석은 백성과 천한 노비라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이에 이르러 士大夫와 선비로서 모여 장사지낸 자가 삼백 여명이었다.
1572년
萬曆 원년
1573년
11월 초하루에 위패를 받들어 伊山書院에 奉安하고 釋菜하는 예를 행하였다. 서원은 榮川郡의 동쪽 6,7리에 있는데 戊午년 가을에 郡守 安이 세운 것으로 선생께서 일찍이 記를 지으셨더니 이 때에 郡守 許忠吉이 서원 가운데에 사당을 지어 선생을 제사지내니 이 일이 주상께 아뢰어져서 이듬해에 伊山書院이라 賜額하셨다.
1574년
봄에 서원을 陶山의 남쪽에 세우기로 하였다. 온 마을 선비들이 의논하기를 陶山은 선생께서 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가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여러 걸음 나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였다.
1575년
여름에 서원을 다 짓거늘 陶山書院이라 賜額하였다.
1576년
2월 丁丑, 13일에 위패를 奉安하고 釋菜할 예를 행하였고 이날에 廬江書院에서도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보다 먼저 안동선비들이 낙동강 상류에 서원을 세웠는데 고을 동쪽 삼십리에 있는 것을 白連寺의 옛터인데 이름하여 廬江書院이라 하고 앞에 누각이 있으니 養浩樓라 하였다.
12월에 諡號를 주시니 文純이다.<道와 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文이라 하고 중립해서 바르고 精하고 순수한 것을 純이라 한다.>
1596년
1596년 윤8월 戊寅, 14일에 誌石을 묻었다.<선생께서 스스로 명을 지으셨고 高峰 奇大升이 그 뒤에 서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