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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의 인물

퇴계선생이 남긴 저술

퇴계선생이 남긴 글들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난 1,600년에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으로서 발간되었다. 51권 31책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의 학문적 저술은 일정한 제목아래 체계적인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보통이나 옛날 문집의 형식은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 먼저 시(詩)가 소개되고, 다음에 벼슬을 한 사람 이면 나라에 올린 소(疏) 계(啓) 차(箚) 등의 글이 소개되고 다음에는 살았을 때 주고 받은 편지를 소개하고, 그 다음에 잡저(雜著)라 하여 오늘날의 학문이론에 해당하는 저술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는 글의 앞뒤에 실은 서(序) 기(記) 발(跋) 등의 글을 소개하고 이어 제문(祭文) 묘갈(墓碣) 행장(行狀) 등을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퇴계선생의 문집도 이러한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해 보면 1~5권까지는 시로서 대략 1,000여 수에 해당하는 많은 시가 소개되고 있다. 5~6권까지는 임금의 뜻을 전하는 교서(敎書), 무진6조소(戊辰六條疏), 그 밖에 많은 사직소(辭職疏) 등으로 되어 있다. 9~40卷까지는 서(書), 즉 편지로 되어 있다. 이 편지가 문집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 800통에 가까운 편지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물론 일상 생활의 문안편지도 있지마는 퇴계선생의 편지내용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것이다. 철학적인 이론에 대한 해명,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 등 제자들의 학문의 정도, 자질의 차이 등에 따라 각양각색의 답변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

41권은 잡저로서 천명도(天命圖)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序), 진서산(眞西山)의 저술인 심경(心經)에 대한 견해를 밝힌 심경후론(心經後論), 서화담(徐花潭)의 제자인 이연방(李蓮坊)이 주장한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心無體用)는 이론을 반박한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 서화담이 주장한 이기는 하나이다(理氣爲一物)는 이론을 반박한 비이기위일물변증(非理氣爲一物辯證), 명나라 때의 학자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인 전습록(傳習錄)을 비판한 전습록론변(傳習錄論辯) 등을 싣고 있다. 42권은 서(序)와 기(記)를 싣고 있는데 서로는 주자서절요에 대한 서, 계몽전의의 서 등이 있고, 기는 단양(丹陽)의 산수를 찬양한 기, 경복궁을 다시 짓고 난 후 그 사실을 서술한 기, 이산서원(伊山書院), 영봉서원(迎鳳書院), 역동서원(易東書院) 등의 기가 있다. 43권은 발(跋)을 싣고, 44권은 잠명(箴銘), 표전(表箋), 상양문(上양文) 등을 싣고, 45권은 축문(祝文)과 제문(祭文)을 싣고, 46, 47권은 묘갈(墓碣)을 싣고 48, 49권은 행장(行狀) 등을 싣고 있다.

위의 내용은 퇴계선생문집 초간본의 내용이고 그 후 외집, 별집, 속집 등이 계속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들 문집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별도로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들이 또 많다. 삼경석의(三經釋義), 사서석의(四書釋義),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등이 있다.

1958년에 성균관대학교 부설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위의 퇴계선생의 모든 저술들을 모으고 그 위에 퇴계선생언행록, 퇴계선생에 대한 만제록(輓祭錄),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 등 퇴계선생에 관한 후인들의 기록을 총집성하여 퇴계전서(退溪全書)를 간행하였다.

퇴계선생의 학문적 전승

퇴계선생을 일러 유학자이다, 주자학자이다, 혹은 성리학의 대가이다 등 여러가지로 표현한다. 한 사람의 학자에 대한 규정이 어찌하여 이렇듯 여러가지로 표현될까? 그것은 유학이란 학문성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학은 중국의 정통사상으로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시대에 따라 그 학문성격을 각기 달리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큰 테두리에서는 다같이 유학에 속하면서도 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따라 그가 전공한 유학의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퇴계선생이 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유학가운데 있어서 그가 관심을 가졌떤 유학은 송대에 발달된 유학, 특히 주자가 주장한 유학을 탐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을 일러 주자학의 대가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리학의 대가란 또 무슨 뜻인가? 주자의 학문내용이 곧 사람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이를 성리학이라고 했던 것이니 퇴계선생은 이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한 학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퇴계선생의 학문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퇴계선생이 이어 받았던 유학이 어떤 학문이며, 그리고 주자학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던가에 대하여 대강이나마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유학의 발생과 흐름

유학이 공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공자는 B.C. 551년 중국의 노(魯)나라에서 태어 났다. 노나라는 주(周)나라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주(周)나라는 문왕(文王)이 덕을 쌓아 나라의 기초를 닦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군사를 일으켜 은(殷)나라를 멸하고 세운 나라이다. 그런데 이 주나라를 세운 사람은 무왕이지만 주의 모든 정체적인 제도를 정한 것은 무왕의 아우인 주공(周公)이었다. 주공은 지혜가 뛰어나고 덕이 높은 분이었다. 그는 주나라의 운명이 오래 계속되도록 정치적인 두 가지 기본제도를 정하였다. 첫째는 장자상속(長子相續)제도이고, 둘째는 봉건제도(封建制度)이었다. 주나라 보다 앞선 왕조인 은나라는 맏아들이 왕노릇을 하다가 죽으면 그 아우가 이어서 왕이 되는 이른 바 형제상속제도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형제간에 누가 왕이 되느냐의 문제를 두고 항상 문제가 생기고 왕실이 서로 친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주공은 언제나 맏아들만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천자가 다스리는 왕기(王畿) 지방을 제외한 변두리의 땅을 종친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는 정치제도를 마련하였다. 땅을 나누어 주고(封土) 그 땅을 다스리는 임금을 세운다(建侯)는 낱말의 첫 글자를 따서 이를 봉건(封建)제도라고 한다. 노(魯)나라도 이러한 봉건제도의 한 제후국이었다.

언제나 맏아들이 왕이 된다는 대원칙 아래 왕실에 문제가 없어 잘 단결되고, 변방에는 종친들이 울타리가 되어 왕실을 잘 보호해 주면 주나라는 오래도록 나라가 번창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제도란 없는 것이다. 이 주공의 사려깊은 제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즉 처음에는 형제, 숙질 등 가까운 혈연들이 제후국을 다스렸으므로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혈연이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제후국간에 상호갈등이 잦아지게 되었다. 제후국 상호간의 국경문제로 인한 분쟁이 생겨나고, 따라서 그로 인한 전쟁이 생겨나고, 전쟁으로 인하여 제후국의 존패문제가 생기면 거기서 또 신분상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는 등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복잡하게 엉켜가기 시작했다.

공자가 태어난 때는 바야흐로 이와같이 주나라가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기이었다. 이 때를 일러 중국역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하는데 춘주시대는 B.C. 772년부터 B.C. 481년까지 242년이 계속되고 이 춘추시대를 이어 전국시대(戰國時代)가 계속되는데 전국시대는 B.C. 480년부터 B.C. 222년까지 259년의 시기를 말한다.
중국역사 특히 중국정신사에 있어서 이 춘추전국시대 약 500년간은 실로 중요한 시기이다. 고대의 중국 통일국가였던 주나라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고 하던 시대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에 일정한 기준이 없고, 갈팡질팡하던 정신적인 암흑기였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무질서에서 벗어나서 하루 속히 인간사회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걱정이 뚜렷한 체계를 이루게 될 때 그것이 사상이 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역사상에서 가장 많은 사상이 생겨났던 시대이다. 그 때의 많은 사상가들을 표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표현한다. 여러 선생과 수많은 사상가라는 뜻이다. 공자도 이러한 많은 사상가 중의 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상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상가이었다. 그리고 유가(儒家)란 공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면 공자가 주장한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었던가? 그 핵심사상은 인(仁)이었다. 인(仁)은 무엇인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德)을 말함이다. 더욱 쉬운 말로 하면 사람이면 누구나 간직해야 할 정신적인 자세를 말함이다. 공자는 사회가 혼란한 까닭은 사람들이 모두 사람다운 자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각기 사람다운 자세를 가지고 서로 어울리게 되면 인간사회는 질서있는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람다움의 내용! 그것을 공자는 인(仁)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람직한 인간상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노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공자는 인(仁)이란 인간상을 내걸어 만인에게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 공자의 위대성이 있다. 그러면 인간다운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무리를 이루어 함께 어울려 살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생각이 같지 아니하고 이익이 서로 엇갈리는데 어찌 사이좋게 어울릴 수가 있는가? 그러나 어울려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사회이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이 공자의 인의 사상이다.

공자는 사람들이 서로 원활하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각기 제 욕심껏 제 하고 싶은대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공자의 훌륭한 제자인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인간다운 자세, 즉 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제 하고 싶은대로의 욕심을 억누르고 이치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하였다. 또 공자는 사람이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남이 내게 행하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런 방식으로 남에게 대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하기도 하고,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내가 서고 싶은 자리이거든 남을 그 자리에 세워 주고, 내가 그렇게 되고 싶거든 남을 그렇게 되게 해 주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하였다. 사람이란 공통성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면 남도 싫어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면 남도 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헤아려 남에게 내가 싫어하는 바를 강요하지 말며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을 남에게 실현시켜 주면 그 상대가 나를 고맙게 여기고 잘 대해 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의 원리는 개인과 개인과의 일반적인 관계원리이다. 인간은 개인간의 관계에 그치지 아니한다. 개인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가지기 마련이고 나아가서 인간의 집단은 국가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공자는 인간의 사회적인 윤리,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윤리는 어떻게 생각했던가 여기에 공자의 정치윤리, 정치사상이 전개된다. 그 원리만을 간단히 설명하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자기가 위치한 명분(名分)에 합당하도록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의 명분에 합당하게, 신하는 신하의 명분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대통령은 대통령이란 명분에 합당하게, 장관은 장관이란 명분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가 위치한 신분에 알맞는 행동을 하면 사회는 질서가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명(正名)사상이라 한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있어서도 권모술수나 힘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덕(德)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법치(法治)를 배격하고 덕치(德治)를 주장하였다.

이상이 공자사상의 큰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강렬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이 과연 제 욕망을 억누르고 공자가 제시한 도덕과 윤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길이 인간다운 길이라는 것은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에게 그 높은 이상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그 길만이 인간의 길이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 주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육신을 희생시킬지언정 인간다움(仁)은 성취시켜야 한다(殺身成仁)고 확실하게 말하였다. 또 『논어』에 이런 대화가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나라가 유지될려면 구비해야 할 조건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경제(食)와 국방(兵)과 도의(信)니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부득이 희생시켜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국방을 희생시켜야지 하였다. 자공이 다시 남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무엇을 희생시키겠습니까? 하였다. 공자가 이에 대답하기를 경제를 희생시켜야지 하였다. 경제(먹는 것)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경제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목숨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인데 목숨을 버리고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것은 상식과 어긋나는 것이다. 공자도 이 점을 생각했는듯 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은 언제나 죽기 마련이다. 인간사회에 도의가 없으면 사회가 성립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도의가 없으면 왜 사회가 성립되지 못하는가? 사람이 도의를 지키지 아니하고 각자의 욕심대로 행동하면 짐승처럼 서로 싸우게 되어 공동사회가 성립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위의 공자의 말을 뒤집어서 표현한다면, 나는 동물처럼 살기 보다는 사람으로서 죽겠다는 뜻이 된다.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사람답게 살겠다는 공자의 이 확실한 태도가 공자이래 수천년 동안 동양의 삶의 지침이며 삶의 힘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이 맹자에 의하여 더욱 내면적으로 깊이 계승발전되었다. 맹자는 공자가 주장한 인(仁)의 사상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 근거를 밝혔다. 즉 남을 사랑하고 남과 어울릴 수 있는 근거가 사람에게 본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은 나면서부터 남을 사랑하는 성품(仁)과 옳음을 좋아하는 성품(義)과 남에게 사랑하는 성품(禮)과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성품(智)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성품을 타고 났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맹자는 그것을 증명하기를 만약 사람이 철 모르는 어린 아이가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 누구나 깜짝 놀라 그를 붙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배우지 아니하여도 알 수 있고(良知), 배우지 아니하여도 행할 줄 아는 것(良能),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런데 그 본성이 남을 사랑하고 옳음을 좋아하고 남에게 사양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본성이 착한 것(性善說)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이 보배로운 본성을 타고 났으면서도 그 보배로움을 알지 못하고 육신적인 욕망에 이끌리어 함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맹자는 이 점을 지극히 안타까워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집에 기르는 강아지나 병아리가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면 온 동리가 소란스럽게 찾아 다니면서도 막상 제 보배로운 본성을 잃어 버리고서는 이를 찾으려 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사상은 보배로운 본성을 되찾고 이를 크게 드러내는 일이 중심사상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사랑하고 옳음을 좋아하는 마음이 드러나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역시 이 마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이 마음을 충분히 발양할 때 진실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民本政治)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왕이 이 마음을 발양하지 못하고 함부로 못된 짓을 하면 그러한 왕은 갈아 치워야 한다는 혁명사상을 주장하였다.

사람이 비록 배우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이 본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응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맹자는 주장하기를 이 본래의 마음을 놓치지 말고 내 몸에 간직해 있어야 한다(存心)고 하였다. 마음을 꾸준히 간직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본성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養性)고 하였다. 맹자는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을 설명하기를 너무 서둘러도 아니되고, 너무 소홀히 해도 아니되고, 또 억지로 할려고 애써도 아니된다고 하였다. 생명이 자라나듯 자연스럽게 마음을 보담아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마음 간직하기를 온전히 하고 그 마음 쓰기를 극진히 하면, 자연히 그 마음속에 깃든 본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고 하였다. 사람은 서로 공통성이 있으므로 나의 본성을 온전히 알게 되면 따라서 남의 본성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간에 생겨난 만물은 다같이 우주의 이법을 타고 난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되면 그를 미루어 만물의 본성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면 마침내 우주(天)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제 본성을 꿰뚫어 알고 나아가서 만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그리하여 마침내 대우주와 합일될 수 있는 경지(天人合一)를 맹자는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공자와 맹자에 의하여 유교의 학설이 확실하게 세워졌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시대의 일곱나라를 통일하여 진(秦)을 세우게 되자 유학을 여지없이 탄압했다. 왜냐하면 진나라는 엄격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유학은 자유의지에 입각한 윤리도덕을 강조하게 되니 이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학자를 죽이고 유교서적을 불사르는 등(焚書坑儒) 참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악한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 진시황이 죽자 진은 곧 망하고 새로 한(漢)나라가 들어 섰다.

한(漢)은 유학을 나라에서 장려하는 학문(官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진나라 때 흩어진 유학의 경전을 모아 새로 정리하고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 등 다섯가지 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유학의 경전에 밝은 사람을 나라의 관리로 임용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되자 유학에 대한 연구는 자연 활발하게 되었으나 그 학문성격은 유학정신에 대한 창의적인 새로운 탐구보다는 이미 정리된 유학경전의 낱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해득하려는데 관심이 쏠렸다. 이러한 학문을 훈고학(訓誥學)이라고 한다. 훈고학적인 학풍은 한으로 부터 수(隋) 당(唐)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학이 현실적인 정치제도로서 이용되고 낱말의 뜻풀이를 일삼고 있을 무렵 중국사상계에는 새로운 학문적 충격이 있었다. 즉 불교의 전래이었다. 불교는 본래 사람이 나고 죽는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학문이요, 종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형이상학적인 욕구가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욕구에 해답하는 불교가 전래하자 중국의 많은 학자들이 불교로 쏠리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유학계에도 자기 반성의 한 계기가 생겨났다. 유학에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원리가 없는가? 따지고 보면 역경(易經)은 바로 우주와 인간사회의 변화의 원리가 아닌가? 여기서 유학에 대한 철학적 조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송학(宋學)의 일어남이다.

송학은 한 마디로 유학의 철학화라고 할 수 있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와 그에 대한 설명(太極圖說)으로써 우주의 생성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는 이(理)를 강조하여 이 세상은 온통 이의 나타남이라고 하고, 장횡거(張橫渠)는 우주의 실체는 태허(太虛)이고 그 내용을 이루는 것은 기(氣)이며 이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만물의 변화가 생겨난다고 설명하고, 소강절(邵康節)은 역의 원리로써 이 우주의 생성소멸을 설명했다. 이들을 북송(北宋) 오군자(五君子)라고 하는데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이다.

주자의 학문

주자는 송대가 낳은 위대한 학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주자는 북송의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총집대성하여 주자 자신의 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우주론에 있어서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수용하고, 정명도, 정이천에게서는 이(理)를 수용하고 장횡거에게서는 기를 취하여 이를 교묘히 융합하여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소강절에게서는 주역의 상수학(象數學)을 취하여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와같이 주자는 북송 학자들의 사상을 골고루 취하였으나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은 정이천의 이(理) 사상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자학을 따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주자학이 그 연원으로 따질 때 정이천에 바탕한다는 뜻에서 생겨난 호칭이다.

여기서 잠간 주자학을 중심한 송대 학문의 호칭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듯 하다. 송대철학을 일러서 이학(理學), 성리학(性理學),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등 다양하게 일컫는다. 이들의 학문적인 개념상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학(理學)은 글자 그대로 이(理)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송대 유학의 특색은 철학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송대사람들은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송대철학의 특색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이학이라고 한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이란 말은 정이천이 성은 이이다(性, 理也)고 한데서 생겨난 말이다. 우주의 원리인 이가 사람에게 부여될 때 그것이 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성이 곧 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理)는 일반적인 것이고 성은 사람에게 부여된 이라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이학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주자학은 대자연의 이보다도 인간의 본성문제를 특히 많이 다루었으므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학(道學)이란 학문과 실천을 결부시킨데서 생겨난 표현이다.

도(道)는 길이고 길은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니 바로 실천과 관계되는 것이다. 많은 학문이 지식만을 문제삼고 실천을 문제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참다운 학문, 특히 송대에 있어서 강조된 학문은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를 도학이라고 했던 것이다. 주자학이란 주자에 의하여 체계화된 학문이고, 정주학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자학의 연원관계를 따져서 생겨난 표현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송대철학은 여러가지로 표현되나 그 사상들은 대체로 주자학 속에 포괄된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은 그만큼 집대성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주자의 학문은 송대학문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 이래의 유학을 모두 집대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자는 송대의 이학적 이론으로서 경서(經書)를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 이래의 훈고학도 총집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주자는 중국근세가 낳은 최대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주자학의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주자학의 체계는 너무 방대하여 이를 한마디로 간략히 말하기는 쉽지 아니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송대학문은 유학을 철학적으로 해석한데 특성이 있고 그러한 학문을 집대성한 것이 주자학이므로 주자의 학문도 철학적 이론으로 유학을 체계화한 점에 그 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철학적 이론의 근본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기이원(理氣二元)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존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이와 기는 무엇인가? 이(理)는 모든 사물이 생겨날 수 있는 이치, 또는 원리이고 기(氣)는 사물을 이루는 근원적인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우주만물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주자의 철학은 쉽게 말하면 이 두 가지 근원적인 존재의 성질이 어떠한 것이며, 또 서로 어떻게 어울리며, 나아가서 어떻게 만물을 구성하며 변화시키는가를 설명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자가 주장한 이기문제의 근원적인 규정 몇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 이기는 본질을 달리하는 두 존재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는 사물의 원리, 또는 법칙이 되는 것이고, 기는 사물의 재료가 되는 것으로서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그 성질이 같지 아니하다. 주자는 이를 “완전히 다른 두 존재”(決是二物)라고 하였다.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와 기가 어울려 비록 만물을 구성한다 할지라도 이와 기 그 자체에 있어서 변화가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기가 구성하는 한 사물 안에 있어서도 이는 이로서 있고, 기는 기로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理氣不相雜)이라고 하였다.

㉡ 이기는 항상 어울려 잇기 마련이다.
이와 기는 그 본질은 다를지라도 항상 어울려 함께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세상만물은 모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원리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원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없는 기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 사물과 관련되지 아니하는 원리란 그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또 그런 원리는 사람이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는 기가 없이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가 없는 기는 있을 수 없고, 기가 없는 이도 또한 있을 수 없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理氣不相離)이란 규정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 이와 기는 항상 함께 어울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가 규정한 이기의 기본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이기관계에 대한 주자의 규정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규정은 이기의 본질관계와 사물상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라고 한다면 주자는 다시 이기를 시간과 공간상의 관계에서도 고찰하였다. 즉 이기의 선후이다.

㉢ 이는 기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근본되는 존재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존재에는 시작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이에도 시작이 없고 기에도 시작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한 사물로서 공간을 차지할 때 이와 기는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굳이 이와 기의 선후문제를 따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에 있어서는 선후를 따직 어렵지마는 논리적인 차원에서 그 선후를 따진다면 “이가 기보다 앞선다”(理先氣後)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자의 생각이다. 즉 공간적으로는 이기가 함께 존재하지만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가 기보다 앞서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는 선(善)하고 기는 선악을 아울러 가졌다.
이기의 가치문제를 두고 말하면 이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고 기는 선과 악을 아울려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순수한 법칙이니 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는 이와는 달리 움직이고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악이 싹틀 수 있는 소인을 가지고 있다. 기도 깨끗하여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때는 악하다고 할 수 없으나 이 기가 작용할 대 반드시 이법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그 움직임이 이법에서 벗어날 때는 악이 거기서 생겨날 수 있는 소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는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理貴氣賤) 또는 “이는 선하고 기는 선악을 가졌다”(理善氣有善惡)이라고 표현한다.

㉤ 이기의 동정(動靜)의 문제
주자는 말하기를 이는 생각(情意)도 움직임(造作)도 계획함(計度)도 없다고 하고 기는 쉴 사이 없이 오르락 내리락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존재이고 기만이 운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이가 모든 것의 원리이므로 움직임의 원리도 이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있기 때문에 기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다. 만약 이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없다면 어찌 기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를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없는 추상적인 존재로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기의 움직임이 있다고 할 때 그 움직임은 어떠한 움직임인가? 그것은 원리적인 움직임, 형이상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無動之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움직임은 현상의 사물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움직임과는 구별되는 형이상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것이다. 이상은 주자가 주장한 이기관계의 주요한 원리 몇가지를 추려 본 것이다. 주자는 이상과 같은 이기관으로서 자연의 본질과 현상, 사람의 심성과 행위, 만물의 변파 등을 설명했던 것이다.

주자와 퇴계 선생

퇴계선생은 많은 유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를 숭배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서문에서 회암(晦菴) 주선생은 공자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 나셔서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였나니, 도와 덕은 아득히 높고 그 남기신 사업과 공덕은 광범하고 위대한 것이었다. 경전의 뜻을 밝혀서 후세에 남기셨으니 이는 귀신들에게 물어 본다 할지라도 의심할 바가 없고, 백세 이후에 새로이 태어나는 성인이 본다 할지라도 의혹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얼마나 대단한 찬양인가? 기고봉(奇高峰)에게 준 편지 가운데서도 주자는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고 또한 천하의 모든 사람과 고금의 모든 사람이 다같이 스승으로 높이는 분이다고 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자는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한당대의 유학까지도 총집성한 위대한 학자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의 주자에 대한 숭배는 위에 본 바와 같이 철저했다. 자신이 위대해야 남의 위대함을 비로소 아는 법이다. 과연 퇴계선생이었기에 주자를 그렇게 높일 수 있었다고도 할 것이다.

퇴계선생이 주자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40세가 넘어서인듯 하다. 주자서절요 서문에 의하면 중종 38년에 왕명으로 『주자대전』이 간행됨으로써 처음으로 『주자대전』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자대전』이란 주자사상을 총집성한 주자전집을 말함이다. 이 때 퇴계선생의 나이 43세였다. 그 때까지는 『주자대전』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퇴계선생 자신도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또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책이 새로 간행됨에 이를 구하여 병으로 관직을 쉬게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이 책을 읽게 되자 비로소 이 책에 대해서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에 얼마나 깊이 빠져 들었던가는 학봉(鶴峰) 김성일(金城一) 선생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께서 『주자전서』를 서울에서 구하여 오신 후로 문을 닫고 조용히 읽기에 열중하여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중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여름에 혹 탈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면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책을 읽으면 속이 시원하고 저절로 서늘한 기운이 생겨나 더운 줄도 모르게 되니 무슨 탈이 나겠는가?고 하셨다.

다시 학봉이 기록한 언행록의 일절을 인용해 보자.
선생댁에 『주자서』를 베껴 쓴 책이 한 질 있었는데 매우 낡고 글자도 모두 닳아서 헤어졌다. 이것은 너무 여러 번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후 『주자서』가 사람들에 의하여 자주 인출(印出)됨에 따라 새 책을 구하기가 쉬워졌다. 새 책을 구하게 되면 선생께서는 반드시 잘못된 글자를 고쳐 쓰신 후에 다시 한번 익히셨다. 그리하여 장(章)마다 환하게 익히시고 구(句)마다 완전히 익혀서 그것을 응용하시되 선생 자신의 것인양 자유로왔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하시는 것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그 원리가 이 책의 내용과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의문을 가지거나 질문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 책을 빌어 대답하시는데 실정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곤 없었다. 이것은 실로 그 이치를 바로 보고 바로 깨닫고 또 바로 믿어서 마음에 푹 젖어 들고 신명(神明)이 합치했떤 까닭이요, 결코 책으로 읽기만 하거나 귀로 듣고 입으로 외우기만 하여서 되는 일이 아니다.

위의 학봉의 두 기록은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얼마나 알뜰하게 그 사상내용을 탐구했던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문자의 쓰임새가 같지 않은 우리나라 학자로서 『주자대전』을 완전히 익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의 내용을 응용하되 마치 내것인양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공부가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서 책장이 허물어지고 자획이 닳어 없어졌다는 것이 그 철저한 공부를 실증함이다. 언어문자란 부단히 변하는 것이다. 송대의 문자의 쓰임새는 한당대의 문자의 쓰임새와 같지 않다. 한당대의 고대 한문형식에 익숙한 우리나라 학자로서 『주자대전』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퇴계집』 가운데는 퇴계선생의 제자들이 퇴계선생에게 『주자서』 가운데 나오는 알 수 없는 문구들에 대한 질문이 수없이 실려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퇴계선생은 거의 막힘이 없이 해답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퇴게선생이 그만큼 『주자대전』의 내용에 대하여 환하게 밝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주자학자로서 퇴계선생을 숭배했던 산기암재(山崎暗齋)는 주자이후 수많은 주자학자가 있었지만 퇴계선생이 제1인자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주자를 가장 잘 알았던 퇴계선생은 그만큼 주자를 철저하게 신봉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문적인 이론만을 신봉하고 따랐던 것이 아니라 주자의 행동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였다. 학봉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것,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 등을 그대로 본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맹목적 흉내가 아니라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리에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본래 지식만을 추구하는 주지주의 일변도의 학문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합치하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이것을 도학(道學)이라 한다고 했거니와, 퇴계선생은 주자를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문을 스스로 실천하는 한편 주자의 학문을 철저하게 옹호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곧 진리를 지키는 일이요, 진리를 밝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주자학적 이론과 반대되는 많은 학설을 비판하였다. 중국학자로는 주자학을 반대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비판하였고 주자학자이면서 주기(主氣)로 흐른 라정암(羅整菴)을 비판하였고, 또 우리나라 학자로는 주기(主氣)의 입장에 선 서화담(徐花潭)과 화담의 제자 이연방(李蓮坊)을 비판하였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해석을 통하여 선학(禪學)에 물든 노소재(盧蘇齋)를 비판하였고,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辯)을 통하여 이와 기를 하나로만 보는 기고봉(奇高峰)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주자의 올바른 이기관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설을 옹호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주자의 사상을 전파보급하고 그 학맥이 면면히 이어가기를 희망하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작업이 곧 『주서절요』(朱書節要)와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서』는 『주자대전』 가운데 실려 있는 주자의 편지를 말함이요, 『주자대전』이 총 100권인데 그 가운데 편지글이 제24권에서 제64권까지 40권에 걸쳐 실려 있으니 전체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학자들은 편지를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생활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한편 학문사상에 관한 질의응답 등을 주로 편지를 통하여 교환했던 것이다. 주자의 편지글이 그렇듯 많은 것은 제자들과의 학문적인 교류를 그만큼 많이 했다는 증거이다. 이 많은 편지글을 사람마다 모두 읽고 그 사상내용을 이해하기란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이 많은 편지글 가운데 주자의 사상이 잘 표현된 것, 또 후세 사람으로서 공부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편지들만 골라 뽑아서 14권 7책으로 하여 이를 『주서절요』(朱書節要)라고 했던 것이다. 절요란 중요한 것을 골랐다는 뜻이다. 퇴계선생이 이와같이 『주서절요』를 편찬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쉽게 주자학에로 인도하려는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서절요』의 서문에서 퇴계선생은 밝히기를 이 편지들은 사람의 재능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병에 맞춰 약을 주고, 무게에 따라 저울질 하듯이 어떤 때는 추켜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끌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와 주기도 하고, 또더러는 격려하여 나아가게도 하고, 더러는 물리쳐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 마음씀이 자세하여 털끝만한 악도 용납하지 아니하고, 의리를 밝힘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차이도 앞질러 지적해 내고 있다. 규모가 크고 마음씀이 엄밀하여 마치 엷은 얼음위를 걸어가듯 조심하는 마음을 게을리 아니하고, 자기를 되돌려 살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마음이 행여 해이하여질까 부지런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스스로 날로 향상하고, 남을 일깨워 주고 이끌어 줌에 있어서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말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아 일어나게 하는 바가 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문인들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백세의 뒤에 있어서도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마치 마주 대해서 일러주는 말을 듣는듯 함을 느끼게 된다. …… 사람이 학문을 하려면 반드시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고 성현의 글을 읽고 부지런히 외우면서도 도학에 힘쓰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단서를 터줌이 없고 그 마음에 느끼게 하는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편지글은 한 때의 스승과 제자간에 학문의 내용을 밝히고 공부에 관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이 편지 속의 말들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게 하지 않음이 없다. …… 학자로 하여금 마음에 크게 감동을 주어 참답게 알고 이를 실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책 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고 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서절요』로서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학문에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또한 주자학의 진작이기도 한 것이었다.

퇴계선생이 주자학의 올바른 전승의 맥을 밝히려고 편술한 책이 곧 『송계원명이학통록』이다. 퇴계선생은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 자료를 이용하여 주자와 더불어 학문적인 관련이 있었던 제자와 후대 즉 원(元), 명(明)대의 주자학자들을 총망라하여 이를 조사하여 그들의 이력과 학문, 사상을 정리하여 이를 『송계원명이학통록』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실린 사람의 수는 총 516명이다. 이학통록의 서문에서 퇴계선생은 밝히기를 이 통록을 펴내는 것은 여기에 실린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앎으로써 도학의 정신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당시 주자학은 옳지 않은 학문(僞學)이라 하여 법으로 금하도록 한 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과감하게 일어나 도에 뜻을 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주자의 가르침을 청하고 학문에 관하여 질문함으로써 주자의 뜻을 드러나게 하였다.

비록 묻는 사람은 각양각색으로 다르지만 선생의 대답은 개개인의 경우에 맞추어서 더러는 들추기도 하고 더러는 억누르기도 하였으니 어느 것이나 지극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 지극한 가르침은 결국 이것을 물어온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을 다 기록에 넣는 것이 이 학문(斯道)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칠 줄 아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 하였는데 나도 주자의 도를 존중할 줄 아는 자는 다 주자의 무리라고 말한다.

이 서문에서 짐직할 수 있듯이 퇴계선생은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던 주자학을 세상에 널리 펴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으로 이 이학통록을 펴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 유명하든 말든 관계없이 주자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모두 진리의 사도로서 인정하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진리의 동반자임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퇴계선생은 철저하게 주자를 숭배하고 그의 학문을 세상에 널리 펴려고 노력한 학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