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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의 인물

태어나신 환경

퇴계선생의 성은 이(李),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이고, 퇴계(退溪)는 그의 호이다. 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 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식(埴), 어머니는 순천 박씨였다.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퇴계선생이 태어나신 후 7개월만인 이듬해 6월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좀 더 자세히 그 가정 내력을 알아 보자. 퇴계선생의 관향(貫鄕)은 진성(眞城)이니 그 시조는 이석(李碩)이다. 그는 청송군 진보현의 아전이었다. 그러므로 진성 이씨를 진보 이씨라고도 한다. 퇴계선생은 이석의 6대손이다. 이석의 아들 이자수(李子修)가 고려 공민왕 11년에 비장(裨將)으로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토벌하여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안사공신(安社功臣) 즉 나라를 평안케 한 공신이란 칭호를 받고 송안군(松安君) 즉 청송 안동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아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그 후 왜구의 난을 피하여 진보현에서 안동부 풍산현 말애(磨崖)로 옮겼다가 다시 두루(周村)로 옮겨 살았다.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예안현 온계리의 경치를 탐하여 이 곳에 정착하게 되고, 퇴계선생이 여기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아버지 이식은 처음 예조정랑(禮曹正郞) 벼슬에 있었던 의성 김씨인 김한철(金漢哲)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3남중 한 아들은 어려서 죽고, 아들 잠(潛)과 하(河) 그리고 딸을 남긴 채 김씨부인은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순천 박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를 낳았으니 첫째는 의, 둘째는 해, 셋째는 징, 네째가 퇴계선생 황(滉)이다. 그러니 퇴계선생은 7남매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신 것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퇴계선생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훌륭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하거니와 퇴계선생의 어머니도 그러한 한 분이었다. 퇴계선생이 쓰신 그 어머니의 비문을 중심으로 박씨부인의 행적을 대강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맏아들 잠(潛)만이 겨우 결혼을 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린 자식들이었다. 부인은 이 여러 자녀들을 키우기 위하여 농사일과 누에치는 일을 남달리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연이은 가뭄으로 남들은 가산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예가 많았는데도 부인은 그 가산을 유지했으며 아들들을 공부시키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뒷받침을 잘 했다고 한다. 부인은 늘 자녀들을 훈계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비없는 자식은 교육을 받지 못해 버릇이 없다고 비웃으니 너희들이 남의 백배를 노력하지 아니하면 어찌 이런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자녀들의 공부를 독려했으며, 특히 글공부 뿐만 아니라, 몸가짐과 행동을 바르게 하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나중에 해(瀣)와 황(滉) 두 아들이 대과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음에도 부인은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의 시끄러움과 벼슬길의 어려움을 근심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부인은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식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그 어머니의 묘비명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우리 어머니시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이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으로는 어머니의 교훈 외에 또 그 가정적인 학문분위기를 지적할 수 있다. 아버지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나 직접 그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 학문하는 분위기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이식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였고, 많은 책을 두루 읽었다. 그는 당시 시골 선비로서는 드물만큼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지게 된 인연은 그의 첫 부인과 관계가 있다. 첫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는 앞에서 소개했듯이 예조정랑을 지낸 김한철이었는데 가계가 넉넉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 일찍 죽었다. 그의 아내가 사위인 이식이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하게 공부하는 것을 기려 남편이 남긴 책을 모두 사위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식은 이 책으로 더욱 깊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호학의 영향외에 또 퇴계선생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삼촌인 송재(松齋) 이우이다. 그는 형인 이식과 함께 공부하여 대과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 학자였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인품이 고매하였으며 형이 죽은 후 많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그 학문을 지도했다. 퇴계선생도 학문의 기초를 삼촌인 송재공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어진 천품

퇴계선생의 일생을 요약한 연보의 8세조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록이 적혀 있다. 둘째 형이 칼로 손을 베었을 때 선생이 형을 붙들고 울었다. 어머니께서 너의 형은 손을 베었는데도 울지 않는데 너가 왜 우느냐?고 하셨다.
이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는 아니 하지마는 피가 이렇게 흐르니 어찌 그 손이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고 하였다.
선생은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고 공경스러워서 어른에 대하여 조금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비록 한 밤중에 깊이 잠들었을 때라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 재빠르게 응답하되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6~7세때 부터 그러하였다.

위의 두 기록은 극히 간단한 것이지만 퇴계선생의 타고난 어진 천품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막상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흐르는 피를 보고 형이 얼마나 아픈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린 퇴계선생의 어진 마음, 이것이 퇴계선생이 타고나신 마음 바탕이었다.
나중에 퇴계선생이 이기(理氣) 가운데 이(理)를 강조하시고, 그 이의 순선무악(純善無惡), 즉 순수하게 착하고 악함이 없다고 역설하신 그 이론적 근거가 이미 퇴계선생이 타고난 언품 속에 깃들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이 태어나신 온혜리 노송정의 퇴계선생 태실 문앞에는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성인이 오신 문이라는 뜻이다. 그 연유는 퇴계선생의 어머니께서 퇴계선생을 잉태하셨을 때 공자가 그 문앞에 와 서 계신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흔히 위대한 인물을 잉태할 때 상서로운 꿈을 꾼다고 하거니와 퇴계선생이 태어나실 때 공자가 오신 꿈을 꾸었다는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위에 인용한 둘째 항의 기록도 퇴계선생의 천품을 이해하기에 넉넉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5~6세때 부터 그렇듯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고 공경스러워서 언제나 어른 앞에서 민첩하게 행동했다는 것, 그것이 꼭 남이 가르치고 시켜서 되는 일일까 그 천품이 그러했던 것이다.

연보의 6세 때의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웃에 천자문을 가르칠만한 노인이 있어 선생이 그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아침에 일찍 세수하고 빗질하고 그 집 문밖에 이르러서는 속으로 그 전날 배운 바를 몇 번 외어 본 후에 들어가 엎드려 절하되 마치 위대한 스승을 모시듯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학문하는 태도와도 관계되는 것이나 먼저 그 성품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조용침착하고, 신중한 그의 천품을 잘 드러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집에서 이미 넉넉히 외운 전날의 공부이지만 스승 앞에 나아감에 앞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외어보는 그 신중성, 그것이 여섯살의 어린 퇴계선생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퇴계선생은 그 천품이 위대한 학자 또는 성자다운 자질을 타고 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천품을 가졌기에 그의 삼촌인 송재공은 늘 우리 집안을 빛낼 사람은 바로 이 아이이다고 하면서 퇴계선생을 칭찬하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부단한 탐구

퇴계선생은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 부터 학자적인 자질을 가졌다고 앞에서 말했거니와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없이 그렇듯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타고난 자질과 부단한 노력이 어울려 비로소 그렇듯 높은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퇴계선생이 공부한 내력을 대력 간추려 보자.

퇴계선생이 공부를 시작한 것은 6세때 부터였다. 아버지가 안계시고 삼촌은 벼슬길에 나가 계시고, 형들은 삼촌을 따라가 공부하게 되어 퇴계선생은 부득이 천자문을 가르칠만한 이웃집 노인에게 가서 기본 글자를 익혔다. 그 때의 퇴계선생의 배우는 태도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이다. 그 후 퇴계선생이 어떠한 책을 누구에게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연보에 의하면 12세에 삼촌인 송재공에게 논어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 기록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젊은이는 가정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해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스스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자식된 도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이(理)자에 대하여 송재에게 묻기를 모든 일의 올바른 것을 이(理)라고 합니까? 하였다. 송재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미 글의 뜻을 이해하는구나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퇴계선생은 12세에 논어를 읽었고, 그 뜻을 충분히 해득할만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보의 14세조에 ‘글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도 반드시 벽을 향해 앉아 조용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항에 작은 글씨로 설명을 붙이기를 ‘연명(淵明)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들을 그리워 하였다.’ 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서 보면 퇴계선생은 13~4세에 이미 학문에 맛을 붙이고 깊이 몰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도 아랑곳 없이 혼자 책 읽는데 몰두할 수 있었다면 이미 학문에 얼마나 깊은 취미를 가졌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연명(淵明)은 동진(東晋) 때의 시인 도잠(陶潛)의 호이다. 그는 천품이 깨끗하고 세속적인 공명에 초연했던 사람이다. 팽택(彭澤)이란 고을의 군수를 했는데 상관에게 정무를 보고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귀찮아서 쌀 다섯말의 보수 때문에 허리를 굽히기가 싫다하고 그만 군수의 인끈을 던져버리고 내 돌아가노라라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간 분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국화를 기르며 자연을 벗삼아 깨끗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퇴계선생이 14세에 이미 도연명의 시를 그렇게도 좋아하시고 그 인품을 사모하였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퇴계선생의 정신적 취향과 경계를 짐작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 대단히 조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학문에 있어서도 경전이나 역사서 뿐 아니라, 시문(詩文)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보의 18세조에 봄날에 연못을 노래한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슬 맺힌 여린 풀새 물가에 둘러있고 작은 못 맑디 맑아 모래마저 없노매라.
흘러가는 구름, 지나는 새는 곱게 비춰 어울리는데 이따금 제비차고 가는 발길에 물결일가 두렵네.
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時時燕蹴波

산꼴짜기 자그마한 연못가에 이슬맺힌 풀들이 둘러 있고, 연못의 물은 한없이 깨끗하여 흘러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들도 그대로 비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한 폭 그림과 같은 정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화롭고 정겨운 연못에 이따금 제비가 날아와 물결을 차고 감으로써 그 고요함과 조화로움을 깨뜨려 버릴까 염려된다는 내용이다. 한 폭 그림처럼 고요하고 조화로운 이 경계는 바로 18세 때의 퇴계선생의 정신세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보의 19세조에 또 다음의 시가 실려 있다.

홀로 숲속 오두막에서 만권책을 읽으며 한결같은 심사로 10년 세월이 흘렀네.
근래에는 이 세상 근원과 마주치는 듯 이 마음 오로지 태허를 보노라.
獨愛林廬萬卷書 一般心事十年餘
通來似與源頭會 都把吾心看太虛

여기 표현된 태허(太虛)라는 말은 송나라 때의 장횡거(張橫渠: 이름 載)라는 학자가 쓴 말로서 우주의 실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퇴계선생은 19세 때에 우주의 근원과 맞닿는듯, 우주의 실체를 바라보는 경계를 맛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계는 철학적 사색의 깊은 경지에서 얻어지는 체험이다.
이러한 경지가 여간한 공부로서 가능한 것인가 밤낮을 가림없는 부단한 탐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보의 20세조에 ‘주역을 읽고 그 뜻을 탐구하여 거의 잠자고 밥먹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주석을 붙이기를 ‘이 때부터 항상 몸이 마르는 병을 가지게 되었다. ’고 하였다.
퇴계선생은 평생을 건강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젊을 때 지나치게 공부하다가 얻은 병이었다. 퇴계선생은 병이 날만큼 공부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는 삶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단한 진리의 탐구! 그것이 퇴계선생이 퇴계선생으로서 성장되게 하였다고 할 것이다.

벼슬길

옛날에 벼슬길에 나가려면 국가시험인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과거에는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등 여러 단계가 있었는데 이 여러 단계를 모두 거쳐야 했다. 퇴계선생은 27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였다. 향시회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라 하여 이미 선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퇴계선생은 회시에 합격한 후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대과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연보의 32세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생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과거공부에 뜻이 없었다. 형 대헌공(大憲公 : 해(瀣)를 말함)께서 어머님께 아뢰어 권하도록 하여 이 해 문과 별시(別試)의 첫 단계 시험(初試)을 치러 2등으로 합격하였다. 서울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인숙에서 잤는데 밤에 도적들이 들어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선생만은 태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기록으로 보면 대과에 응한 것은 형과 어머니의 권에 의하여 치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 부분의 도적의 이야기에서 퇴계선생은 당시에 이미 외부적인 자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것에 의하여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확고한 정신세계를 이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들이 그렇듯 탐내는 대과의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한 것도 세속적인 부귀공명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때 이미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외계적인 그 무엇도 퇴계선생의 마음을 흐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적떼를 만난 다급한 시점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도 확고하게 자리잡힌 퇴계선생의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퇴계선생이 대과에 급제한 것은 34세 때였다. 3월에 급제하고 4월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퇴계선생의 벼슬길의 시작이었다. 이 때 이후 70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36년 동안 수많은 관직의 종류와 직급을 거쳤다. 여기서 그 복잡한 과정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 중요한 관직생활의 변천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36세에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임명되고
40세에 홍문관교리(校理)가 되었다.
42세에 어사(御史)로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재해상황을 시찰하였다.
48세 1월에 단양군수가 되고, 12월에 풍기군수로 옮겼다.
53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58세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고,
66세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고,
67세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68세에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고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이어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69세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이들 벼슬중 많은 부분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선생은 과거시험에 응하는 것 자체부터 형과 어머니의 권에 의하여 했다고 했거니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을 결코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벼슬이 내릴 때마다 두번 세번 사퇴소를 올려 어떻게든 면할려고 애를 쓰고 그래도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면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가곤 했다. 잠깐 관직에 나갔다가는 또 거듭 거듭 면해달라는 소를 올려 임금이 어쩔 수 없이 면해주면 그 날로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오고, 내려와서는 좀체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퇴계선생을 조정에 불러 올려 나라의 기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명종 때의 좌의정 상진(尙震)은 조사수(趙士秀)와 함께 경연에서 퇴계선생을 모셔와야 한다고 아뢰면서 이황은 그 인품이 허물어져 가는 나라의 풍속을 바로잡을만 하니 임금님께서 직접 편지를 써 부르십시요하였고, 이귀수(李龜壽)는 임금께 글월을 올려 이황은 학문이 있고 도덕이 있으면서 산촌에 물러나 있으니 이런 사람을 받들어 모시면 선비들의 기풍을 북돋울 수가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명종은 직접 편지를 써서 올라오기를 청하되 그대는 뛰어난 덕과 세상에 드문 학문을 가졌으면서도 공명을 탐하지 아니하고, 시골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물러나기만 좋아하는도다. 내 항상 서울에 돌아와 주기를 바라나 어진 이를 구하는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인가 조정에 나와주지 아니하니 내 마음이 진실로 허전하도다.
내 비록 옛 어진 임금과 같은 덕을 못가졌을지언정 그대는 어찌 옛 은사(隱士)처럼 물러나려고만 하는가 속히 올라와 나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주오라고 부르는 편지를 내렸다. 그래도 퇴계선생은 소를 올려 신은 덕이 부족하고 학문이 모자라는데도 공연히 헛된 이름만 나서 임금님을 속이는데 불과하고 또 신의 병이 깊어 임금님의 뜻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하는 내용의 소로 사퇴를 거듭했다.

명종은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어진 이를 부르되 오지 않으니 탄식하노라(招賢不至歎)하는 제목으로 독서당(讀書堂)에서 글읽는 선배들에게 시 한수씩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화공을 시켜 퇴계선생이 사는 도산의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퇴계선생이 지으신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을 읊은 여러 시들을 거기에 쓰도록 하여 이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침전에 펴 두고 퇴계선생을 그리워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퇴계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만 바라고 별다른 치적은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다만 직무를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 일단 직무를 맡게 되면 그 일을 사리에 맞게 그리고 철저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어사가 되어 지방을 순찰하고서는 흉년에 대응하는 대책을 세우도록 건의하고 부정을 행한 탐관오리는 엄격하게 벌하도록 처리하였고, 바야흐로 일본과의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려 할 즈음에 이들을 잘 회유할 수 있는 외교적인 방안을 건의하고, 역대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의 확장배치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지방관으로서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에는 소수서원을 수리하여 서원이 강학의 장소로서 활용될 수 있는 본보기를 세우기도 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치적을 올렸으나 여기서 그 소상한 내용을 다 기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퇴계선생이 마지막으로 벼슬을 사양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진년에 올린 6개조목의 소라는 뜻이다. 이 소는 당시에 있어서 퇴계선생이 나라다스리는 원리의 대강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왕통을 계승하였음을 중하게 여기시고 효성을 온전히 하십시요.
당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명종의 아들이 아니었다. 명종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명종의 서동생인 덕흥군(德興君) 초의 아들로서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즉 양자로 들어와 왕통을 계승한 것이다. 양자에게는 생가의 부모와 양가의 부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여러가지 갈등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옛날의 법에 있어서는 생가와의 인연을 줄이고 계통을 잇는 양가의 인연을 중하게 여기도록 규정하였다. 특히 왕가에 있어서는 국가를 다스리는 왕통이므로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선조에게 이 점을 특히 강조하여 왕통을 중히 여기고 양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② 참소하는 무리들을 막고 양궁(兩宮)을 친하소서.
중종이 돌아가시고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이 제12대 왕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그 뒤를 이어 제13대 왕으로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선조는 이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당 인종의 비 인성왕후박씨(仁聖王后朴氏)가 대왕대비로 있었고, 명종의 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가 왕대비로 있었던 것이다. 양궁(兩宮)이란 바로 이 두 분을 말한 것이다. 궁중에는 많은 궁녀와 내시들이 있다.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중심으로 많은 궁녀들 사이에는 온갖 말썽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특히 인종조와 명종조에는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파벌이 있어 온갖 불상사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여건을 생각하여 퇴계선생은 모든 참소하는 무리들을 막고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잘 모셔서 궁중의 화합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소서.
성학(聖學)이란 성인의 학문 혹은 성왕(聖王)의 학문을 말함이다. 그들이 닦은 학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서경에 실린 16자로 된 말이다. 즉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16자이다. 그 뜻은 사람의 욕심은 위태롭고 진리를 향하는 마음은 가냘프니 이 진리의 마음을 확실하게 하고 오직 이 마음만을 가져서 확실하게 중용을 행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제왕은 언제나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실현하는 방법은 대학의 격물치지, 중용의 성명(成明)의 이론에 있으니 이를 잘 공부하여 확실하게 체득하는 것이 왕으로서 꼭 지켜야 할 원리라는 것이다.

④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 잡으소서.
도술이란 무엇인가? 퇴계선생은 밝히되 하늘에 근거하여 일상 윤리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천하고금이 다같이 말미암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길이 밝혀지면 세상은 다스려지고 이 길이 밝혀지지 않으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길을 밝히는데는 근본과 말절이 있는데 근본은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와 닿도록 확실하게 체득하는 것이고 말절은 외형적인 제도에 의거하여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근본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경(敬)으로 일관해야 된다는 것이다. 경으로써 추구하는 길이 처음에는 쉽지 않은듯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하면 확연히 체득되는 경지가 열린다는 것이다. 즉 퇴계선생은 임금이 우주 생생(生生)의 이법을 마음으로 체득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면 나라에 도덕이 저절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⑤ 복심(腹心)을 미루어 이목(耳目)을 통하게 하소서.
복심은 배와 심장을 말한다. 이것은 비유로서 대신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나라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임금은 머리와 같고 대신은 배와 심장과 같고, 언관(言官)들은 귀와 눈과 같다는 것이다. 정치가 바르게 될려면 첫째 대신들을 잘 써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바른 말로 고하는 언관을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을 쓰는 것은 임금이 하는 것이니, 즉 머리가 밝고 지혜로와야 비로소 바른 사람을 대신으로 기용할 수 있고 대신이 발라야 이목의 역할을 하는 언관들을 또 올바르게 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공정한 인재등용이 있어야 나라의 정치가 바로서게 됨을 강조하였다.

⑥ 성실하게 수양하고 반성하여 하늘의 사랑을 받도록 하소서.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자연현상은 사람의 행위 특히 군주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것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 한다. 퇴계선생은 이 주장을 인용하면서 군주가 군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자연현상도 순조롭게 된다고 생각한 옛사람의 생각을 본받아 임금님께서도 끊임없는 수양과 반성을 통하여 만백성이 그것을 본받고 하늘도 이를 사랑하여 순조로와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무진육조소의 설명은 지나치게 요약하여 본래의 소의 절실한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으나 소의 본문은 지극히 간절하여 퇴계선생의 충정이 여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6가지 조항은 훌륭한 군주가 되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군주시대의 정치원리로서 그 근본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양성, 도덕교육

사람은 누구나 부귀와 공명을 좋아한다. 그런데 퇴계선생은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부귀공명을 마다했을까? 맹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고기도 탐이 나고 곰의 발바닥도 탐이 나는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가 없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옳음(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다 가질 수가 없으면 삶을 버리고 옳음을 취하리라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가 없을 때는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퇴계선생인들 부귀가 근본적으로 싫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마다했을 때는 그것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한 것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자니 그것보다 덜 값지다고 생각한 부귀를 버렸다고 생각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부귀보다도 더 값진 것이 무엇이었던가? 퇴계선생이 생각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참이요, 옳음이었던 것이다. 벼슬길도 본래는 참과 옳음을 추구하고 실현하려고 하는 길이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는 그렇지 못한 때가 있다. 나라에 질서가 없을 때에는 벼슬길은 무자비한 권력의 투쟁장으로 화하기가 쉽다.

퇴계선생이 살던 시대도 이러한 시대였다. 4대사화(四大士禍)가 연달아 일어나던 시대였다. 즉 무오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갑자사화가 연달이 일어나던 때이다. 터무니도 없는 허구의 사실을 얽어 훌륭한 선비들을 한꺼번에 수십명, 때로는 백여명의 선비들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네째 형인 이해(李瀣)도 간신 이기에게 밉게 보여 터무니도 없이 죄에 얽혀 심한 매를 맞고 귀양길을 떠나다가 죽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벼슬길에서는 참과 옮음을 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퇴계선생은 진작 간파했떤 것이다. 그리하여 진작부터 일생의 사업으로 해야 할 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곧 학문을 통한 교화이었다. 이를 통하여 장차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고, 또 도덕을 회복해 보고자 하였다. 속담에 10년 앞을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100년 이후를 생각해서는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퇴계선생은 당시의 정계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에서 교육을 통하여 후일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 도산서당 지금의 도산서원인 것이다.

퇴계선생이 교화활동을 생각한 것은 30대 전후의 젊은 때부터인듯 하다. 과거에 응할 생각이 적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주변의 권에 의하여 과거를 보게 되고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부득이 벼슬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에 와서는 학문을 통한 교화활동에 대한 욕구가 점점 굳어져 50세 때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강학의 자리를 폈던 것이다. 이 때 이후 안동을 중심한 영남지방은 물론이요, 경향각지에서 퇴계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그리워하여 글을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것이다. 지금 전하는 도산급문록(陶山及門錄) 즉 퇴계선생 문인록에는 109명이 적혀 있다. 이들 가운데 정승의 지위에 오른 분이 9명이나 된다. 비록 정승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깊은 물에 고기가 모인다는 속담도 있듯이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대체로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곧 퇴계선생의 학문과 덕행이 위대했던 증거이다. 과거에 급제를 하고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르 사람들은 더욱 두드러진 사람들이었거니와 비록 그러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도산급문록에 기록된 인물들은 대체로 한 고을, 한 문중의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도산서당에서 배운 바를 각기의 문중, 각기의 고을에서 이를 펴나갔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학문적인 영향권은 전국적인 것이지만 특히 영남지방에 있어서의 그 영향은 지대했던 것이다. 그 흐름이 오늘날에까지도 은연중에 지속되어 온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퇴계선생이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을 통한 교화사업을 전개한 것이 얼마나 값진 계획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원숙한 인간상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퇴계선생은 거듭 내려진 벼슬을 한사코 거절하고 시골에 묻혀 제자들 가르치기를 좋아 하였다. 많은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방방곡곡에 도덕적인 기풍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대학에 군자는 집을 나서지 아니하고 나라에 모화를 편다는 말이 있다. 퇴계선생이야 말로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지역사회에 있어서 그리고 조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받들고 그의 말을 높이고 따랐던 것이다. 어떠한 덕을 갖추면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받들고 진심으로 따르게 될 것인가? 이러한 경지는 사람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해야 하고 본받아야 할 경지라고 할 것이다.

퇴계선생의 이러한 원숙한 덕의 경계를 기록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가정생활 특히 부부생활에 있어서 살펴 보자.
퇴계선생의 부부생활은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다. 퇴계선생은 21세에 진사였던 허찬(許瓚)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젊은 남녀가 처음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 사랑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정중하고 천연스러워 남들은 모두 부부간에 정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퇴계선생은 그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 다만 정도를 넘어서서 흐트러진 행동을 삼가했을 따름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에 부부의 도리는 서로 공경하기를 마치 귀한 손님 대하듯 해야 한다(相敬如賓)는 말이 있다. 그리고 오륜(五倫)에 있어서도 부부의 윤리는 부부유별이라고 하였다. 부부유별에 있어서 유별(有別)의 뜻이 무엇인가? 흔히 부부는 맡은 바 일에 있어서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남편은 바깥 일을, 여자는 안의 일을 맡는 직능적인 구별의 뜻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러한 뜻도 없는 바 아니나, 유별의 보다 절실한 뜻은 부부간에 지켜야 할 행위의 한계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무관한 사이이다. 그렇듯 가깝고 무관함으로 그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인격적인 행위, 도덕적인 행위의 한계를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옛 성현들이 부부는 특히 부부로서 지켜야 할 행위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구체적인 예로서 손님 대하듯 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백번 천번 듣고,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런데 퇴계선생은 이 어려운 윤리를 실천했던 것이다.

부부사이에 있어서 인격적인 행위의 한계를 지키고 그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떠한 일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자제력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확고부동한 인격적인 자아가 형성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은 초년에 이 부부의 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이 지극히 사랑했던 허씨부인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계선생 27세 되던 해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를 낳고 11월에 허씨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첫째 부인이 죽고 3년 후인 퇴계선생 30세 때 둘째 부인으로 권씨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권씨부인은 권질의 따님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권씨부인의 할아버지 권주(權柱)는 갑자사화때 억울하게 희생되고 그의 아버지 권질과 삼촌 권전도 또한 정치적 음해로 인하여 아버지는 예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삼촌은 형장에서 매맞아 죽어서 시체로 돌아오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가는 등 참변을 겪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권씨부인은 어린 처녀시절에 이러한 참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비백산하여 그 때 이후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평소 절의를 중아헤 여겼던 퇴계선생은 이 권씨가문의 억울한 사정을 마음아파 하던 차에 예안에 귀양와 있던 권질이 퇴계선생에게 자기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해 달라고 제의함으로써 이 혼인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정신이 남들처럼 온전하지 못한 부인과 함께 사는 고충이 어찌 한 두가지일까마는 퇴계선생은 결코 그 어려움을 입밖에 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 권씨부인도 퇴계선생이 46세 되던 해 7월에 죽었다. 이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음으로 퇴계선생은 첫째 부인한테서 난 아들들로 하여금 친어머니를 모시듯 초상장례와 3년상을 잘 모시게 하였다.

위와 같이 퇴계선생은 인간윤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의 도리를 인간으로서는 더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의 화평을 유지하고 남편으로서 신의를 다하고 아내로 하여금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일생을 마칠 수 있게 하였다. 사람이란 자기자신이 굳건하게 설 수 있어야 남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법이다. 퇴계선생 자신이 이러한 도리를 실천했음으로 남의 어려움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퇴계선생의 제자에 이함형(李咸亨, 자는 平叔, 호는 山天齋)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전라도 순천 사람으로 멀리 퇴계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하였다. 이를 알게 된 퇴계선생은 이함형이 가르침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편지 한장을 써 주었다. 그 편지의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공자가 말씀하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게 된다 하고, 자사(子思)는 말씀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 하고, 또 시(詩)에서 말하기를 처자와 잘 화합하되 마치 거문고와 비타가 조화되듯 한다고 하고 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부모란 자식이 화합하면 그저 따를 뿐이로다고 하였으니 부부의 윤리란 이같이 중대한 것이니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하여 어찌 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학에 말하기를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그 말절이 잘 다스려지는 법은 없으며 후(厚)하게 대접해야 할 자리에 박(薄)하게 대하면서 박하게 대해도 좋을 곳에 후하게 대하는 법은 없느니라고 하였다. 맹자께서 이 말을 부연하여 말씀하기를 후하게 대해야 할 자리에 박하게 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박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 사람됨이 이미 각박하다면 어찌 부모를 섬길 것이며 어찌 형제와 일가친척과 고을사람들과 잘 지낼 것이며 어찌 임금을 섬기고 남들을 부리는 근본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들으니 그대는 부부가 화합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행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 살펴 보건데 세상에는 이러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 가운데는 부인의 성품이 악독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와 모양이 못나거나 지혜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남편이 방탕하거나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말하면 그 성품이 악독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드 남편이 항상 반성하여 잘 대해 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세. 그 성품이 악독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7가지 이유로 아내를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란 한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쫓아서 가도를 망가뜨리고 자손이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대학에 말하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내 경우를 들어 말하리라.

나는 일찌기 재혼을 햇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년이나 했다네. 그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내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옛날 후한 때 사람 질운이 아내가 부부의 도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 말을 빌려 그대에게 충고하노니 그대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해서 고치도록 힘쓰라.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다면 학문은 해서 무엇하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이 편지를 읽은 이함형은 그 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고치게 되고 부부가 화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감사의 뜻을 표하는 의미에서 3년동안 마음으로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만약 이 편지를 퇴계선생이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고 가정했을 때 이함형이 과연 그렇듯 쉽게 그의 행동을 고쳤을까? 편지글에 인용된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이 말은 대학의 해설 제9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 앞뒤의 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순(堯舜)이 천하를 다스림에 인(仁)으로써 하니 백성들이 그에 따랐고, 걸주(桀紂)가 천하를 다스림에 포악함으로써 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그렇게 되었느니라.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이 그 자신의 행동과 반대되는 것이면 백성들이 따라가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있는 연후에 남에게 선을 권하고 자기자신에게 악함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라는 법이다. 자기자신에 남을 용납하고 남과 함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는 법이다. 이 말은 실로 진리이다.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는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아랫사람에게는 착한 짓을 하라고 아무리 명령하고 가르쳐도 그 말은 먹혀 들지 아니한다. 명령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일호의 사특함이 없을 때 그 말이 위엄을 가지고 남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함형도 퇴계선생이 실천하는 올바른 생활을 눈으로 보고 그 말의 권위에 감복되고 거기에 따랐던 것이다.

위 이야기는 퇴계서생이 제자를 가르친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부부유별의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윤리를 실천한 퇴계선생이니 다른 윤리야 더 말할 여지가 없다. 퇴계선생의 학문은 모두 머리로 외우고 입으로만 말하는 학문이 아니라, 옛 성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는 학문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가득했고 그의 행동은 그러한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퇴계선생은 남에게 감명을 줄 수 있었고 따라서 많은 훌륭한 제자를 키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퇴계선생이 남들에게 끼친 교화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몇가지 기록을 더 제시해 보자. 퇴계선생 언행록 성덕(成德)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사욕이란 깨끗이 없어지고 진리가 환히 밝아져서 나와 만물 사이에 너와 나라는 구별과 한계가 없었다. 그 마음은 바로 천지만물과 함께 움직이고 조화되어 그때 그때마다 사리에 들어맞는 오묘함이 있었다.

김성일(金成一) 기록
우성전(禹性傳 ― 퇴계선생 제자)이 오래 화산(花山 ― 안동의 옛 이름)에 머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읍내 사람들은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퇴계선생을 알고 존경하고 먼 시골사람으로서 퇴계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또한 선생을 사모하고 두려워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아니하였다. 혹 옳지 못한 짓을 하게되면 퇴게선생이 알게 될까 두려워 하니 선생의 교화가 사람들에게 미침이 이와 같았다.

우성전(禹性傳) 기록
앞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퇴계선생의 학문의 경계를 알 수 있고 뒤의 인용문에서는 퇴계선생의 교화의 위대성을 알 수 있다. 퇴계선생에게는 사욕이란 말끔이 가려지고 진리가 마치 태양처럼 밝아서 그 행동이 그대로 자연의 이치와 합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져서 혼연히 하나의 세계가 된 경지를 성스러운 경지라고 한다.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 있었기에 그 교화가 아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온 고을에 퍼질 수가 있었다. 한번 뵈옵지도 못하고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는데도 그저 존경하고 따르며 행여라도 못된 짓을 하고는 퇴계선생이 아실까 두려워 할만큼 퇴계선생의 교화는 온 고을에 퍼졌던 것이다. 이러한 교화를 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교화라고 한다.

퇴계선생의 함이 없이 이루어진 교화는 안동의 시골사람에게만 행하여진 것이 아니다. 율곡선생의 경연일기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당시 어려운 나라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훌륭한 학자들을 조정으로 불러 올려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모여 시골에 묻혀 지내는 많은 학자들을 왕명으로 불러 올리게 되었다. 물론 퇴계선생은 그 첫째로 꼽히는 학자였다. 성화같이 재촉하는 왕명으로 퇴계선생은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 갔다. 여러 대신들과 나라일을 걱정하는 자리에 마침 경기도 파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모시러 갔던 관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성혼은 서울로 올라 올 의사가 없더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율곡선생이 올라 올 생각이 없거든 그만 두도록 하라고 했다. 퇴계선생이 이 말을 듣고 아니 숙헌(叔獻, 율곡의 자)은 어째 호원(浩原, 성혼의 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나에게는 왜 그렇게도 각박한가? 하였다. 그것은 퇴계선생을 모시는데 율곡이 앞장서서 어떻게든지 모셔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때 율곡선생의 말씀이 선생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호원은 아직 공부하는 과정에 있으니 본인이 굳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면 억지로 불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선생님이 서울에 와 계시면 선비들의 기풍(士風)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어찌 선생님을 모시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굳이 조정에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서울에 와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고 하였다. 아무 말없이 서울에 와 계시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순화된다고 한 율곡선생의 말씀.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 결코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선생은 말없이 남을 교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

노자에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行石言之敎)는 말이 있다. 참된 교육은 말없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 하는 교육은 낮은 차원의 교육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보다 높은 차원의 심성을 교화하는 방법은 말을 넘어선 교육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육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이 말끔이 씻어진 순수 선(善)의 화신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로서 바로 이러한 세계를 채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계는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계로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라고도 할 것이다.

조용한 최후

퇴계선생은 1570년 선조 3년 음력 12월 8일 유시(酉時 ― 6시경)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 최후는 일생동안 부지런히 학문하신 학자답게 담담하고 조용한 최후였다. 퇴계전서에 수록된 퇴계선생언행록 말미에 고종기(考終記)라는 짤막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기록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11월 9일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주요한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옮겨 보자.

○ 경오 11월 9일 시사(時祀) 때문에 온계(溫溪)로 올라가 종가에서 주무셨는데 한증(寒症)을 느끼셨다. 제사를 지낼 때 신위를 모셔오는 일과 제물을 바치는 일 등을 몸소 하셨다. 기운이 더욱 불편했으므로 자제(子弟)들이 몸이 불편하시니 제사에 참사하지 마십시요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제 늙어서 제사에 참여할 날도 많지 않으니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 12일, 이 날부터 일기쓰시기를 그만 두셨다. 15일에 기명언(奇明彦 ― 기대승의 자(字) 호는 고봉)의 편지를 가지고 온 심부름꾼을 기다리게 하여 병석에서 치지격물설(致知格物說)을 수정하는 답서를 쓰시고 자제들을 시켜 정서토록 하여 기명언과 정자중(鄭子中, 이름은 유일(惟一), 호는 문봉(文峰)) 등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 12월 2일, 병이 심하여 약을 드신 후 오늘이 내 장인 제사날이니 고기반찬을 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 3일, 설사가 났다. 매화분이 옆에 있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말씀하기를 매화형한테 불결하여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하였다.

같은 날 병증세가 심히 위독했다. 자제들에게 명하여 남에게서 빌린 책들을 빠짐없이 반환하라고 하셨다. 또 손자 안도(安道)에게 명하기를 전에 교정한 경주본(慶州本) 심경(心經)을 아무가 빌려 갔는데 너가 찾아와서 한참봉(韓參奉)에게 보내어 판본 중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 이 말씀은 전에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인 한안명(韓安命)이 경주에서 발간한 심경(心經) 가운데 틀리고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하면서 선생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한 바가 있었는데 이 때 그 책을 남이 빌려 가서 미쳐 부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 4일에 조카인 영에게 명하여 유언을 받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라에서 내리는 일반적인 예장(禮葬)은 사양하고, 반드시 유언대로 시행하겠다고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할 것. 
둘째, 유밀과(油密果)는 쓰지 말 것. 
셋째, 비석은 쓰지 말고, 작은 돌의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그 뒷면에는 태어난 곳, 조상의 갈래, 평소의 생각과 행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 선 내력의 대략을 가례(家禮)의 형식에 따라 쓰도록 하라. 이것을 만약 남에게 부탁하여 짓도록 하면 기고봉(奇高奉)과 같이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반드시 야단스레 없는 사실을 늘여 놓음으로써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평소의 생각을 스스로 서술할까 하여 먼저 명문(銘文)을 짓고, 그 나머지는 그럭저럭 하는 사이 완성치 못하였는데 그 글이 원고뭉치 속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그 명문을 쓰도록 하라. 
넷째, 윗대의 묘갈을 다 마치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모름지기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서 세우도록 하라. 
다섯째, 구경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들러 설 터이니 너의 상주노릇은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다르니 모든 일을 반드시 집안과 고을에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널리 묻고 상의해서 해야 오늘날의 예속에도 합당하고 옛날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몇 가지 집안 일에 관한 유언이 있었다. 

이 날 오후에 여러 제자(弟子)들을 만나 보고자 하였다. 이 때 자제(子弟)들이 몸이 불편함을 걱정하여 그만 두시기를 권했으나 선생께서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니 만나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시면서 웃옷을 입히게 하여 여러 제자들을 불러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평소에 옳지 못한 견해로써 여러분들과 종일토록 강론을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고 하셨다. 

○ 5일에 영에게 대간(臺諫)에서 올린 요구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셨다(당시에 양사(兩司)에서 을사(乙巳)년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논하고 있었다). 영이 아직 허락이 나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니 결국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하고 거듭 탄식하셨다. 
○ 7일에 아들 적(寂)에게 명하여 덕홍(德弘 ―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에게 책을 정리하도록 이르라고 하였다. 덕홍이 그 말씀을 듣고 물러나 동문들과 함께 점을 쳤더니 점괘가 겸괘(謙卦)의 군자가 마침이 있도다(君子有終)라는 괘사였다. 제자 김부륜(金富倫 ― 자는 돈서, 호는 설월당(雪月堂)) 등이 책을 덮고 실망하였다. 
○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일렀다. 이 날 날이 밝았는데 유시(酉時)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선생의 집 위에 모이더니 눈이 안 치(寸) 남짓 내렸다. 이 때 선생이 누웠던 자리를 정돈케 하고 붙들어 일으켜 앉게 한 후 돌아가셨다. 그러자 곧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내렸다.

이 날 유시에 돌아가시자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평소에 알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와 조문하였다. 비록 일찌기 왕래가 없었던 사람들도 모두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조문하고 슬퍼하였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고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비통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고종기에는 위의 기록 외에도 상례절차 문제 등에 관한 몇가지 기록이 더 실려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퇴계선생의 최후와 직접 관련되는 사실이 아니니 여기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위의 기록으로서 우리는 퇴계선생의 최후가 얼마나 조용한 것이었으며 질서있고 여유있는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생명이 다하고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갈림길이다. 캄캄한 미지의 세계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다정한 형제처자를 떠나 홀로 가야하는 미지의 세계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며 심지어는 몸부림치며 제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초인간적인 능력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안주를 얻고 영생을 길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평소에 종교를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도 죽음의 순간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한편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부귀영화를 위하여 평생 욕망의 노예로 허덕이다가, 죽음에 다달아서는 그 부귀영화를 저 세상에까지 그대로 연장시키고자 한다. 역대의 제왕들이 지하궁전을 마련한다든가, 돈 있는 사람들이 호화분묘를 마련하는 사실 등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의 한 몸부림이라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일반적인 죽음 앞에서의 몸부림에 비하면 퇴계선생의 죽음은 얼마나 조용하고 여유있는 것이었던가?

퇴계선생의 일생은 오직 진리를 찾고 진리를 실천하는데 있었다. 그 생활이 그대로 죽음의 순간까지도 계속된 것이다.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시고, 학문을 논할 기력이 다했을 때에는 마지막으로 그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이제 선생에게 더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종기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의 병이 위독했을 때 가족들이 조상신과 천지신명에 기도를 올렸는데 선생이 이를 아시고 그러지 말라고 중단을 시켰다고 한다. 평생을 올바르게 살고 이제 하 일 다하였으니 더 바랄 것도 더 구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은 생전에도 남의 비웃음을 살 일이라곤 아예 없었거니와 돌아가신 후에까지도 행여나 잘못됨이 있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까지도 스스로 마련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유언에서 밝혔듯이 돌아가신 후 비문의 기록이 혹 자신을 과장표현할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을 미리 마련하려고 했으나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 명문(銘文)만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명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이 많았다.
젊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느즈막엔 어쩌다가 벼슬길에 들었네.
학문의 길은 갈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 내려지네.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 지냈나니
나라 은혜 생각하니 부끄럽고
성현 말씀은 두려웁네.
산은 높디 높고
물은 흐르고 흐르는구나.
모든 것 떨쳐버리고 노니르니
세상 비난도 벗어났네.
내 생각 남 모르니
내 뜻 누가 즐기랴?
옛 분들 생각하니
내 마음 꿰뚫었네.
오는 세상엔들
오늘을 알리 없으랴?
근심 가운데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조화따라 돌아가노니
또 바랄 것이 무엇이랴?

퇴계선생은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다 하시고 조용히 가셨다. 열자(列子)의 무덤을 보고 한 말이 있다. 군자는 쉼이오, 소인은 거꾸러짐이다(君子休焉 小人伏焉)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한 군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휴식이오, 욕망에 급급한 소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욕망 앞에 거꾸러짐이라는 뜻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휴식이었다.